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우주 Dec 21. 2021

적당한 옷걸이 같은 사람

빨래널다 이어진 생각의 나래

<나의 옷걸이 사용처>

빨래를 말리고 옷을 정리할 때, 시래기나 무말랭이를 만들려고 재료를 걸어 말릴 때 또는 당근에 옷을 팔기 위해 자세히 보여주려고 사진을 찍을 때 사용한다.


<나의 옷걸이 사용법>

옷걸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옷을 그 위에 올려 걸기도 하고, 옷걸이를 들고 한쪽씩 걸기도 한다. 목둘레가 너무 좁아 옷의 목 쪽으로 옷걸이가 들어가지 않을 때 옷의 아랫단 속으로 옷걸이를 밀어 넣어 옷의 어깨 쪽으로 올려 걸기도 한다. 


<옷걸이 모양>

양복집에 많이 걸려있는 어깨의 넓이가 넓은 것과 세탁소에서 세탁을 마치고 걸어서 주는 가느다란 것, 바지를 같이 걸 수 있게 바지 집는 집게가 달려 있는 것, 몸통은 가느다랗고 어깨 끝이 뭉뚝한 것, 태풍이 불어 우산살만 남긴 듯 휘어진 것, 끈 달린 옷을 걸도록 낙타의 쌍봉 같은 혹을 만들어 놓거나 반대로 작게 패인 구멍을 만들어 놓은 것 등 다양하다.


어깨가 넓으면 옷의 어깨가 망가지지 않고 보관이 가능하다. 하지만 너무 넓어 옷장에 많이 걸기가 부담스럽다. 어깨가 너무 좁고 가느다라면 옷장에 가득 넣을 수 있으나 옷의 어깨 모양을 망가뜨리는 단점이 있다.



 모든 것을 품겠다는 듯 당당하게 어깨를 펼치고 있지만 완전히 품지는 않는다. 품어준다기보다는 잠시 자신을 이용해 가지런함을 유지하라고만 하는 것 같다. 너무 오래 걸어두면 걸려있는 옷과 하나가 되려는 듯 옷걸이 자신의 모양을 한껏 드러낸다. 오래 걸어둘 요량이면 옷의 소재와 옷걸이의 모양을 구별해 잘 맞는 조합으로 걸어야 한다.




사람도 그러하지 않을까? 너무 가늘지도 너무 넓지도 않은 어깨를 가진 적당히 융통성 있는 사람은 여기저기 잘 어울린다. 예민하고 뾰족한 시선을 가지고 있으면 주변에 호불호가 갈려 조금은 힘든 관계 맺기가 형성된다. 반대로 관대하고 상대방에 맞게 대화할 줄 아는 사람은 주변에 그(녀)를 따르는 사람이 많아진다. 


옷걸이를 사용하기 위해 옷에 따른 모양을 고르고 사용법에 따라 모양 자체를 바꾸기도 한다. 우리도 옷걸이처럼 나의 다양한 내적 존재를 끄집어내어 현재의 쓰임새와 상황에 따라 발현시키며 살아간다. 엄마와 시어머니를 대할 때 그 발현의 농도는 최고치가 된다. 


코로나의 엄습으로 우리는 모두 언택트 시대와 가깝게 살아가고 있다. 이 시점에서 어떤 융통성을 발휘하며 살아야 할까? 어떤 내적 존재를 몸에 걸고 강화시켜야 할까? 더 이상 아이에게 주입식 교육을 강요하지 않고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발현시킬 수 있게 돕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은 알 것 같다. 좋아하는 것 하나만으로 메타버스 세상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세상이 실현됐고, 아이가 내 나이쯤 되었을 때에는 이미 그런 현상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 있을 것이다.


가늘지도 두껍지도 않은 적당한 옷걸이처럼 여기저기 모두 사용되고 사용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물론 겁도 난다. 내가 제일 많이 가진 옷걸이는 세탁소에서 준 가느다란 옷걸이다. 그래서 그걸로 옷을 거는 것이 더 빠르고 쉽다. 하지만 그 옷걸이로 오래 걸어두었다간 제대로 입을 옷이 남아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현재에 맞게 적당한 옷걸이를 검색하고 구입하고 옷을 빼내 다시 거는 수고로움을 거쳐야 한다. 


물론 선택사항이다. 이미 변화하고 있는 옷을 보면서 내가 가진 귀차니즘과 두려움을 앞세워 뭉그적 거리고 있자니 그 또한 불편하다.  편리한 아날로그 방식을 뾰족하게 밀고 가지도 않으면서 적당한 어깨를 가진 옷걸이를 찾고자 오늘도 디지털 세상에 발을 담근다. 이 옷 저 옷을 잠시라도 걸 수 있게 사용되는 옷걸이처럼 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넘나들며 나의 부캐를 만들어갈 수 있는 나만의 옷걸이를 찾으려 한다. 



이전 09화 나에게서 나온 일부가 나를 자라게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