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첫 돌이 지나자 육아가 조금은 편해졌다. 잠도 꽤 잘 자고 밥도 우리와 비슷한 식으로 조금씩 먹어가면서 신생아를 키우던 시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 펼쳐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기가 너무 예뻤다. 내가 이렇게나 아기를 예쁘다고 느끼다니! 스스로가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즈음 남편과 나는 둘만의 술자리에서 종종 둘째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첫째 아기를 키워보니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둘째가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다 이내 우리는 우리들만의 시간이 매우 중요한 사람이라 아기 둘을 키우기 어렵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기를 낳은 뒤로 우리의 시간이 빠른 속도로 증발해버린 것이 가장 힘들었기 때문이다.
2년의 육아휴직을 계획했던 나는 남은 일 년을 육아와 내 시간을 적절히 배분할 생각에 설렜다. 지금까지 아기 때문에 갇힌 생활을 했지만 이제 조금은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겠지.
그러던 어느 날 생리가 며칠 늦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테스트기를 해봤다. 역시나 한 줄. 마침 아기가 울어서 테스트기를 세면대 위에 두고는 아기를 잠시 달래 놓고는 다시 돌아왔더니 아주 희미하게 두 줄이 보였다. 순간 눈을 의심했다. 아니겠지?
나는 학창 시절부터 불규칙한 생리 주기로 살아왔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주기가 워낙 길어 계절별로 생리를 하기도 했다. 아기를 가지려고 했을 때도 불규칙한 생리 주기 때문인지 쉽게 임신이 되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실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단 한 번 피임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 아기가 생겨버린 것이다.
병원에 가서 아기집을 확인하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임신한 상태에서 이제 겨우 돌이 된 아기를 키울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둘째에 대한 고민도 있었던 터라 남편과 나는 우리의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임신 초기에는 워낙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 많아서 지금껏 해 오던 운동도 못 하고 아기만 돌보며 더더욱 집에 갇혀 있는 생활을 했다. 원래는 아기를 재우고 남편과 늘 술을 마시곤 했는데 그것마저 할 수 없으니 너무 답답했다.
첼로를 배우기 시작한 건 그쯤이었다. 오래전부터 배우고 싶었지만 여러 사정상 미뤄오다가 지금이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긴 활로 낮은음들을 연주하는 동안 내내 즐거웠고 위안도 받았다. 몇 달 지나지 않아 배가 너무 불러와서 첼로조차 배우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첫째 아기는 배가 불러오는 나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임신한 상태에서 아기를 돌보는 게 쉽지 않았지만 온 힘을 다해 버텼다. 그 무렵 재접근기에 해당했던 첫째 아기는 엄마 껌딱지가 되어 있었고, 조산기가 있었던 나는 아기를 안아주기 힘든 상태였다.
하루는 아기가 콧물이 나서 병원에 가려고 유아차에 태웠는데 아기가 격렬하게 거부했다. 무조건 안아달라고 엉엉 울었다. 나는 아기를 안아줄 수 없어 억지로 우는 아기를 유아차에 태웠다. 병원을 가는 내내 아기는 유아차를 탈출하려고 몸을 내빼면서 급기야 대성통곡을 하기에 이르렀다. 길 가던 사람들이 배가 나온 나를 한 번 보고, 울면서 유아차에서 내리려는 아기를 한 번 보고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지나갔다. 아기는 병원에 도착해서 진료가 끝날 때까지 울어댔고, 약국 앞에서 결국 나는 전화기 버튼을 눌러 남편에게 SOS를 쳤다.
결국 만삭의 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첫째 아기를 어린이집에 보냈다. 평생 일하는 엄마로 살 예정이라 육아휴직 동안은 아기 곁에 있어 주고 싶었는데 내 한계를 벗어났다.
기질적으로 변화에 예민한 첫째 아기는 어린이집 적응이 쉽지 않았지만 서서히 적응해나갔다. 그사이 나는 연년생으로 두 번째 아기를 출산했다. 나의 육아휴직은 두 번의 출산으로 인해 4년간 휴직하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그리고 손꼽아 기다렸던 나만의 시간도 그만큼 더 미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