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끝자락이었다. 교원 임용고시 스터디 그룹에서 충원 멤버를 뽑았고 내가 그 대상으로 스터디에 합류하게 됐다. 모두가 교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이었다. 충원 멤버로 들어간 나를 제외하고는.
어릴 적부터 내 꿈은 기자였다. 장래 희망란을 두고 고민하던 친구들 사이에서 뚜렷한 꿈을 적어내던 나를 사람들은 신기해했다. 중학교 때 시사토론부에 들어가 신문 기사를 꼼꼼하게 분석한 파일이 두툼하게 몇 권은 됐다. 고등학교 때는 교지편집부에서 활동했고, 대학교에 가서는 전공보다 대학신문사 기자 활동에 더 중점을 뒀다.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고 나는 덜컥 한 방송사 기자 시험 최종면접에 합격했다. 언론고시 준비를 막 시작하던 시점이라 얼떨떨했다. 알고 보니 최종면접에 합격한 2명을 인턴기자로 채용해, 한 달간 지켜본 후 최종적으로 1명을 정기자로 채용하는 시스템이었다. 아직 졸업 전인 나는 인턴기자 경험만으로도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에 한 달간 방송사 수습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새벽 2시에 퇴근해 새벽 5시에 출근하는 사회부 수습기자의 삶은 참혹했다. 새벽마다 경찰서를 돌면서 여자 기자를 대놓고 무시하는 남자 경찰들과 기 싸움을 해야만 했다. 화면에 나오는 방송기자였기 때문에 깔끔한 정장 차림에 메이크업하고 취재를 해야 했고, 당시 긴 머리를 한 여자 기자를 곱게 보지 않는 시선으로 태어나 처음으로 쇼트커트도 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대학신문사 기자를 하던 시절에는 집회 취재를 하면 현장에 같이 녹아들어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기사로 썼는데 반해, 방송기자는 내가 화면의 중심이고 현장이 내 배경이 되어 카메라 기자 선배가 그림을 따는 형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었다. 방송 기사의 특성상 매우 짧은 시간 안에 기사 전달을 해야 하므로 깊이 있는 내용보다는 사실 전달에 치중하는 기사를 많이 쓴다는 것도 나에게 맞지 않았다. 신문사에서 르포 기사를 쓰고 싶었던 나는 화면이 중심이 되는 방송기자 생활이 즐겁지 않았다. 점점 방송과 언론에 염증을 느꼈다.
게다가 같이 합격한 인턴기자가 긴 시간 기자를 준비해 온 언론고시 장수생이라 경험도 나보다 많았고, 사회생활도 능수능란하게 잘했다. 조직문화나 선후배 관계보다는 그 생활을 버텨나가는데 집중했던 나로서는 첫 사회생활에서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짧았던 방송기자 생활 후 나는 오랜 꿈을 접었다. 내가 꿈꿔왔던 언론계와 실제로 경험한 언론계는 차이가 컸다. 졸업 후 나는 두 번째 꿈이었던 국어 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영어영문학과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내가 국어 교사가 되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결국 편입시험을 쳐서 사범대 국어교육과에 학사편입을 했다.
대학이라는 공간을 워낙 좋아했던 나는 다른 전공으로 공부하는 내내 즐거웠다. 그곳에서 일반사회교육까지 전공하게 되면서 무려 4가지 전공을 갖게 됐다. 공부하는 동안 즐거웠고, 대학에서의 삶이 이어지는 게 좋았다.
사범대까지 졸업하자 이제는 사회로 나가야 했다. 여러 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경제적 여유만 된다면 다양한 학문을 배우며 계속 대학에 머무르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밥벌이를 찾아야 했다.
그렇게 찾은 첫 직업은 대안학교 교사였다. 일반 학교보다는 대안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싶었다. 연희동에 있는 대안학교에서 고되게 2년을 일했고, 여러 이유로 퇴사했다. 다시 백수로 돌아온 나는 조금 쉬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서른을 넘은 내가 아무 계획도 없이 쉬기에는 주변의 압박이 심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교원 임용고시 스터디였다. 나의 휴식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필요했고, 덕분에 부모님께 경제적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그 당시 내 일상은 발레와 재즈댄스를 배우며 생활에 활기를 찾던 중이었다. 취미와 휴식이 중점이 되던 생활에서 스터디는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교사라는 꿈을 향해 달려 나가던 사람들이었다. 스터디에서 나이는 가장 많았지만 지식은 가장 적었던 나는 그들에게 적어도 피해는 끼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스터디 멤버들은 ‘술’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는 오전 10시에 만나 오후 2시까지 열심히 공부했고 오후 2시부터 밤이 저물 때까지 술을 마셨다. 신촌의 밤거리는 곳곳에 우리의 아지트를 만들어주었다. 일 년 내내 열정적으로 술을 마셔댔던 우리는 그해 임용시험에서 모두 낙방했다. 그리고 뿔뿔이 흩어져 공부한 뒤 다음 해에 모두 교사로 임용되었다. ‘신촌 술터디’라고 이름 지었던 스터디에서 만난 멤버들은 지금까지도 모여서 밤새 술을 마신다. 그리고 그 어떤 친구들보다 든든한 우정을 쌓아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