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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주 Dec 01. 2024

성서적 특수교육 6

쟤는 누굴 닮아 저렇지? 예수님의 행동장애

어려서 많이 울었다고 한다. 너무 울어 재우려면 한 사람이 등에 업고 동네를 돌아다녀야 했다. 대부분의 우는 애를 달래기 위해서는 업고나 안고 흔드는 것만으로 효과가 있다는데 나의 울음은 쉽사리 그치지를 않았다. 결국 한 사람은 업고 덩실덩실 스텝을 밟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장단에 맞추어 등을 두드리며 한 시간이 넘게 동네를 돌아다녀야 겨우 재울 수가 있다고 했다. 엄마는 우리 집안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돌연변이라며 "잰 누굴 닮아 저래?"를 입에 달고 사셨다. 그 후 1년쯤 지나 소아마비를 앓고 나서 다리를 절게 되자 "넌 울어서 스스로 팔자를 망친 x이야"라고 설명해 주셨다. 가족 어느 누구와도 닮은 구석이 없는.. 그래서 정이 가지 않는.. 마치 사자새끼를 데려다 키우는 것 같다는 이질감으로 범벅이 된 감정을 가끔 표출하시곤 했다. 망친 팔자라고 하는데도 나는 스스로 나쁜 팔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엄마에게 이질감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 닮은 곳을 보고 동질감이 샘솟게 되고 좋아하는 감정을 키울 수 있는 것 같다. 


행동장애까지 겸한 발달장애 아동을 볼 때 사람들은 그들도 우리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닮고 태어났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예수님의 문제행동을 찾아봤다. 나는 성경 속에서 거침없고, 사람들의 기대치를 여지없이 벗어나는 말과 행동, 가진 게 별로 없어도 늘 당당한 자신감과 태도, 상상을 초월하는 아이디어가 번득이는 모습으로 서술되는 인간적 예수님을 만날 때마다 너무도 신이 나고 재미있다. 하나님을 믿던 구약의 사람들은 커밍아웃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매서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예수님을 통해 자신들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특별한 메시지가 무엇일까 찾으려 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와 행동은 그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뭔가 심히 달라 보였다. 예수님이 그럼 구약의 율법을 깨러 온 걸까라고 생각을 하게 했던 바로 그때의 예수님 행동들이 너무 신나고 웃음이 나와 배가 아플 지경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예수님은 당대 사람들이 따랐던 규율과 법을 깨는 행동을 마구마구 하셨다. 무엇보다 이삭서리 방조 사건을 들 수 있다 (눅 6:1). 안식일에 추수하는 노동을 하면 안 되는 "율법"을 어기고 배가 고팠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을 지나다가 이삭을 잘라먹었는데도 예수님은 막지 않으셨다. 오히려 청개구리처럼 안식일에 하면 안 되는 일을 보란 듯이 하신 경우도 있다. 율법에 어긋나는 나쁜 행동(?)의 증거를 잡기 위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눈을 부릅뜨고 쫓아다니자 갑자기 걸음을 멈추시고 어떤 손 마른 사람을 한가운데로 불러내시어 손을 고쳐주신 것이다 (눅 6: 6-11). 또한 누가 도와달라고 하면 법적으로 5리까지만 도와주면 되는데 스스럼없이 10리까지라도 도우라며 법을 무시하는 가르침을 주시기도 했다 (마 5:41). 문제행동을 가진 친구들이 학교규칙만이 아니라 사회생활에서 지켜야 하는 규칙들을 깨는 그런 행동과 너무 비슷하다.


소위 엄마들이 나쁜 친구를 사귀지 말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자녀들에게 말하듯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유대인들은 부정하고 나쁜 사람들과 어울리면 안 된다고 가르치고 실천하는 듯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런 사람들과 가깝게 어울리시는 것이었다. 말을 섞으면 안 되는 사마리아 외갓여인과 대화를 했을 뿐만 아니라 물까지 얻어 마시기도 하셨다 (요 4:7-9). 몸에서 피가 유출되는 병을 앓는 사람은 부정한 사람이라 (레위기 15: 2-33) 멀리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안식일에 혈루증을 앓는 여인의 병을 치료해 줬을 뿐만 아니라 그의 부정한 죄까지 사하여 주었다 (막 5:34). 또한 세리와 죄인들과 친하게 어울리셨고 이방인까지 강권하여 데려와 집(APT! APT!)를 채우라고 (눅 14:15-24) 하시고 그들과 파티 파티 (마 11:19)를 하셨다. 


교과서에서 나오는 문제행동도 많이 하셨다. 장로들의 전통에 따라 밥 먹기 전에 손을 깨끗이 씻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손을 안 씻은 채 음식을 먹었다 (마 15:2). 나도 흔히 저지르는 이 문제행동을 예수님도 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땅에다 캬악~ 침을 뱉기도 하고, 침으로 으깬 진흙을 남에 눈에 바르기(요 9:6)도 하셨다. 더 나아가 중증장애에 속하는 행동도 하셨는데 노끈과 채찍을 휘둘러 성전에 있는 사람들을 쫓아내고 상을 둘러엎으시기도 했다 (요 2:15). 진짜 예수님은 행동장애였음이 틀림없다. 나는 이런 예수님의 행동을 읽으면 기분이 참 좋다. 왜냐하면 장애인을 마치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우리들과는 매우 다른 이질적인 집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 없어질 것 같아서이다. 바로 하나님의 형상 중에는 문제행동도 존재한다는 증거이고 행동장애인도 우리처럼 하나님을 형상을 빼어 닮은 것이다.


지금까지 나열한 예수님의 행동을 문제행동이라고 서술한 내용이 약간 억측 같은 주장으로 들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 ㅎㅎ! 예수님의 행동이 겉으로 보면 그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문제행동"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행동들의 이유를 설명을 하셨다. 예수님은 "제사장외에 먹으며 안 되는 진설병을 제사장이 다윗에게 나누어준 적이 있다 (눅 6:3-4)"며 그들의 전통도 지적하시었고 사람의 아들인 "인자가 인식일의 주인이다 (눅 6:5)"라고 이유를 설명하셨다. 그리고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일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이었다 (눅 6:9-10). 또한 병들고 부정한 사람, 세리와 죄인, 이방인까지 친하게 어울리고 잔치에 데려오라시던 행동들은 그들에게까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함 (요 4:14)"이라고 설명하신다.


손을 닦지 않고 밥을 먹은 문제행동도 이유를 설명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마 15:3)"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마 15:11)"고 말씀하셨다. 손 닦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아니라 전통에 따라 인간이 만든 것임을 지적하셨고, 그런 전통보다는 사랑의 실천이 중요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또한 침을 뱉고 남의 눈에 흙을 바른 이유는 당연히 맹인의 눈을 고쳐주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또한 그 고침을 행한 자가 누구인가를 직접 말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임을 인정하게 하고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음(요 9:39)"을 알려주고 구원의 길을 보여주시고자 하는 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성전에서 사람들을 내쫓고 상의 뒤엎은 문제행동 뒤에는 "하나님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는 (요 2:16)" 가시적인 목적 외에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가 삼 일 후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요 2:19-22) 예언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의 모든 문제행동 뒤에는 우리를 위한 깊은 뜻이 있듯이 인간의 모든 행동은 반드시 "기능"이 있다. 문제행동의 기능은 (1) 뭔가를 얻기 위해, (2) 관심을 끌기 위해, (3) 하기 싫은 것을 피하기 위해, (4) 신경학적인 내적 충족을 얻기 위한 네 가지 중에 하나에 속한다. 그래서 아동의 문제행동 그 자체를 걱정하기보다는 그 행동의  목적 즉 "왜?" 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행동이 목적하는 바를 표현하실 수 있었지만 장애아동들은 스스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각 행동의 의사소통 기능을 다양한 상황에서 관찰하여 자료를 수집해야 한다. 기능을 알고 나면 많은 문제행동은 사라질 수 있다. 뭔가를 가지고 싶어 하는 기능이면 원하는 것이 위험한 것이 아니라면 그냥 주면 된다. 관심을 원하는 아이는 관심을 달라고 문제행동을 일으키기 전에 미리미리 관심을 주면 된다. 하기 싫어하면 시키지 않으면 된다. 물론 살면서 싫어도 해야 하는 때가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바로 "호랑이 달래며 산 넘어가기" 신공을 펼치면 된다. "몇 개만 하면, 안 시키지~" 그러면서 그 "몇 개"의 숫자를 차츰 늘려가는 것이다. 


상동행동과 같이 신경학적인 충족을 위해 자폐성 아동이 보이는 특이행동의 경우는 "자신을 해치거나" "남을 해치는" 행동이 아니면 대부분 아동과 싸우기보다는 그냥 허락하는 것이다. 자신을 해치거나 남을 해치는 경우는 다치지 않을 수 있도록 환경을 바꾸는 일과 의사와 전문가의 진단과 협조가 필요하다. 교회학교에서도 부모를 통해 의약품 복용 등에 관한 정보를 얻고 학교와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구축하여 "일관성"있는 도움을 계획해야 한다. 문제행동에만 초점을 두어 "안돼"로 억압하면 자기가 원하는 것이 성취될 때까지 더 큰 문제행동으로 발전되거나 다른 문제행동으로 전이되기도 한다. 대여섯 살 된 아동을 뛰어다니지 못하도록 그의 손목을 잡고 있다면 어른의 힘을 이기지 못해 뛰어다니는 행동이 없어진 것 같아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손목을 풀기 위해 할퀴고 때리고 상처를 낼 정도로 점점 더 과격해질 수 있다. 뛸 수 없는 행동이 바닥에 드러눕거나 바지에 소변을 본다거나 침을 뱉는다거나 하는 다른 문제 행동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예수님의 행동을 장애로 보고 뒤쫓아 다니며, "왜"를 외치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으로 남기보다는, 예수님이 그 행동을 통해 가르치시고자 하는 깊은 뜻을 헤아리고 믿음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행동장애 아동의 문제행동을 눈에 보이지 않게 없애고자 만 하기보다는 그 행동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늘 살펴 미리 대처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행동을 목표로 삼아 못하게 하고 없애려고 하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다양한 의사소통 방법을 가르쳐 행동대신으로 의사소통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게 하는 것이다. 개개인에게 맞는 다양한 의사소통 방법을 배워서 그 방법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양을 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믿음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목표로 꾸준히 기다리고 교육하는 것이 성서적 특수교육 방법인 것이다. 



특수교육 전공자로서 특수목회에 이바지하시는 목회자와 자원봉사자, 그리고 전체 성도들과 나눌 수 있는 지식을 얻기 위해 캘리포니아 풀러신학대학 (Fuller Seminary)에서 목회학을 수료했으나 특수교육이나 교육방법이라는 틀에서 성서를 바라보는 글이라 성경말씀을 현대적 표현으로 쓰기도 하고 또 해석을 잘못했을 수도 있음으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먼저 이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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