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비는 내리다 말고 땅과 밀당을 한다.
정말 오랜만에 빗소리가 창문을 두드리는 것 같다. 올 듯 말 듯 땅과 밀당하듯이 조금의 곁을 내주던 비가 보슬보슬 창문 너머 골목길을 적시는 중이다. 점심을 먹고 오후 두 시쯤이면 산책을 위해 집을 나서는 시간인데 오늘은 내리는 '비'로 몇 자 적고 있다.
사계절 중 좋아하는 계절은 여름이고, 추운 겨울 날씨는 좋아하지 않지만 내리는 ‘눈’은 많이 좋아한다.
여름에 내리는 비는 정해진 일상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비가 내리는 날은 일을 하다가도 창 밖을 바라보며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었다.
근무했던 장소들이 오피스 뷰가 좋아서였는지, 이 십 대의 젊음이 있어서였는지, 비가 내리는 창문 너머 비원에서 비를 맞고 있는 소나무들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이 너무 예쁘게 보여서였는지는 모르겠다. 비가 오면 그때의 마음이 고스란히 떠올라 아무 생각 없이 내리는 비를 보고 있곤 한다.
비가 오면 축축해지는 옷과 신발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비가 내리면서 짖어는 풀 내음과 흙 내음이 바람에 실려 콧등을 스치고 갈 때면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도 어딘가에서 날아오는 담뱃불 냄새도 자동차 매연도 다 사라지고 숲길을 걷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비의 가장 큰 매력은 이게 아닐까.
가끔씩 일은 내버려 두고 창 밖만 바라보다가 검토 후 사인해야 할 서류도 그대로 묵혀두다가 팀원이 와서 서류 주십사 하면 그제야 불야불야 검토할 때도 있었다.
요즘은 서울에 살면서 ‘비’와 ‘눈’ 모두 그 계절에 어울리게 적정한 양이 내리는 걸 보기가 정말 어렵다. 어렸을 때만 해도 여름 장마철에는 비도 많이 오고 겨울에는 눈도 제법 내려 동네에서 눈 사람도 만들고 비탈진 언덕길에서 썰매를 타기도 했는데 지금은 이런 날이 흔치 않다. 겨울에 눈 내리는 것을 보기 위해 강원도를 찾아야 고민해야 할 만큼 눈 내리는 모습을 보는 게 흔하지 않게 되었고, 여름에 잘도 내리던 비도 동, 서, 남, 북으로 많이도 내리면서 서울은 쓰~윽 지나쳐 버리곤 한다. 시원하게 내리는 비를 보러 제주도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나.
문득 요즘 사람들이 화가 많아지는 이유 중의 하나가 내려야 할 ‘비’와 ‘눈’이 내리지 않아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문득 글을 쓰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독히 이성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비’ 나 ‘눈’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감성적으로 바뀌게 만들어 준다. 이런 좋은 외부 자극이 일상의 삶에서 한 번씩 후~욱하고 들어와 줘야 하는데, 돌발적인 외부 자극이 거의 존재하지 않아 매일매일 쌓이는 스트레스 수치를 낮춰줄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뜻하지 않은 반가운 빗소리는 끓어올랐던 감정을 차분하게 추스를 수 있는 여유를, 뜻하지 않게 내리는 눈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설레고 기분이 좋아지는 일인데 이런 여유를 느낄 수 있는 횟수가 자체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일상을 살면서 자신이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주어지는 쉼표 같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데 그런 쉼표 같은 시간을 자연이 제공해 주지 않는 듯하다. 미친 듯이 일만 하라는 뜻인가? 이러다 서로 머리채 잡고 싸우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오늘도 어김없이 빗줄기는 벌써 줄어들고 해가 뜨는 듯 밖이 밝아지고 있다.
길게도 아니고 하루 정도 시원하게 비가 내리면 얼마나 좋을까. 오후 산책 시간에 개천을 따라가다 보면 비가 정말 오랫동안 오지 않아서 개천도 바닥을 보이고 있는 중이다. 개천에 살고 있는 청둥오리 가족들은 비가 오기를 고대하고 있지 않을 까. 물이 점점 줄어드니 먹을 것도 바닥을 보이고 있을 텐데.. 말은 못 하지만 속이 타 들어가는 중임이 틀림없을 것이리라.
비가 충분히 올 수 있게 종묘에서 기우제라도 지내야 하는 게 아닐까.
날씨가 밝아져 오니 늦은 산책을 나가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