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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정희 Aug 12. 2023

지금은 당신의 여름

학부 졸업 요건을 3학점만 남겨놓은 4학년 마지막 학기, 당시 우면동에 있었던 LG전자연구소의 물성연구실에서 인턴으로 일할 기회를 잡았다. 전자현미경(TEM: Transmission Electron Microscopy)을 담당하는 책임연구원의 실험을 보조하는 일이었는데, 같은 해 겨울 재료공학 전공으로 미국 대학원들에 지원서를 내려던 내게 그 자리는 소중한 경력 한 줄이 되어 줄 터였다.   


그 때 연구실의 실장은 당시 마흔에 갓 접어든 박사님이셨고, 각종 고가의 분석 장비를 담당하는 삼십 대 초 중반 연구원 일곱 명이 구성원이었다(이 글을 관심있게 읽어주는 분들의 편의를 위해 내 학번을 굳이 밝히자면, 나는 1978년생이자 97학번이다). 2000년대 초반엔 여전히 LG와 삼성전자가 소니, 파나소닉, 샤프 등의 일본 IT 회사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는 인식이 강했지만, ‘80년대를 지나 ‘90년대를 거치며 연구에 무수히 투자하며 쌓인 경험이 뒷받침되면서 한국 회사들도 글로벌 시장에서 의미 있는 활약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보다 두터워지던 때였다.


당시 LG전자 연구소는 브라운관 TV에서 벗어나 한창 열리고 있던 평판 디스플레이 관련 연구에 큰 부분 집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에 따라 LCD(Liquid Crystal Display), 지금은 사라진 PDP (Plasma Display Panel) 그리고 상용화 초입에 들어섰던 OLED(Organic Light Emitting Diode) 관련 샘플 분석 의뢰가 연구실에 많이 들어왔다. 어떤 IT 제품이든 초기 개발을 거쳐 상용화 이후 대형화, 경량화, 가격 안정화 등을 가져오는 데에 재료공학, 전자공학, 기계공학 등 모든 전공자의 시각이 필요하지만, 우리나라 반도체 초기 발전의 역사에 있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재료공학은 대한민국이 디스플레이 강국으로 자리잡기까지 진정 커다란 기여를 했다. 어떤 물질을 써야 하는지, 쓰기로 한 물질을 어떤 공정 순서로 쌓아야 하는지, 미세 구조가 바뀌면 물질이 본래 가진 성질이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 성질을 보존해 주려면 어떤 공정을 더 거쳐야 하는지 등 그 모든 논의가 재료공학이 다루는 범위이기 때문이다.

2002년 Display&Media 사업이 LG전자 연간 매출의 40%였으니, PDP에서 LCD, 그리고 OLED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열리는 혁신의 시장에서 리더십을 잡는 데에 당시 우면동 연구소가 LG전자 내에서 큰 역할을 하던 그 한 복판에서 첨단 분석장비를 잡고 연구소가 이끄는 연구 테마들 제반에 모두 관여하다시피 하고 있는 물성연구실원들의 자부심도 대단히 컸다.


그런 상황 아래에서 제품 주기를 타고, 혹은 신제품 로드맵에 따라 숨가쁘게 연구스케줄을 맞추어야만 하는 대기업 소속 연구소였음에도 당시 물성연구실장 박사님은 연구실 멤버들의 학업을 장려하고, 본인 역시 공부하는 연구자로서의 자세를 여전히 놓지 않았다. 그는 회사가 전략적으로 미는 주력 제품 개발 부서들이 맡기는 분석 의뢰에 보고서를 주는 역할에 한정하지 않고, 제품의 방향성을 선제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 물성연구실이 가져야 할 꿈이라고 생각했다.


자부심과 꿈이 큰 물성연구실장님과 멤버들 사이에서 5개월의 인턴 생활을 한 것도 고마운 일이었는데, 인턴을 마치면서 실장님에게 더 큰 은혜를 입었다. 미국 대학원 진학에 꼭 필요한 추천서를 써 주신 것이다. 요즘 신입 또는 인턴 채용 등으로 보게 되는 레주메를 보면 학부생들이 언제 그렇게도 다양한 경험들을 쌓으며 살고 있는지 눈이 휘둥그레 해 지는데, 당시의 나는 오로지 학교 생활만으로 모든 것을 채워 넣은 심플한 마인드셋의 학부생이었던 고로 LG전자에서의 마지막 학기 인턴십 관련 증거를 긍정적인 추천서로 남긴다는 것은 내게는 사실 절박한 일이었다.

당시 실장이셨던 박사님은 내가 어렵게 드린 부탁을 흔쾌히 수락하고는 정말 오로지 나만을 위해 한 페이지를 빼곡하게 채운 추천서를 열심을 다해 쓴 뒤 내가 지원서를 넣은 학교들에 차곡차곡 보내주셨다. 5개월 간 함께 한 학부생 인턴의 업적이란 건 사실 그저 성실하게 배우는 것에 지나지 않았을 것임에도, 그 성실함이 짧은 시간 할 수 있었던 일과 성실한 자가 앞으로 그릴 수 있을 미래에 대해 시간을 할애해 스토리를 그려준 것이다. 스탠포드에서 입학 허가를 받은 것에 실장님의 지분이 있다고 나는 진지하게 생각해 왔고, 그 뒤로 뵙고 다른 분들께 실장님을 소개할 때마다 그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았다.




내가 스탠포드에서 학위를 하는 동안 LED(Light Emitting Diode)는 상용화 길에 접어들었음에도 여전히 조명과 디스플레이 연구 분야에 있어 Hot Topic이었다. 글로벌 IT 트렌드를 챙기고 LG의 기술을 과시해야 하는 연구소 리더로서 실장님도 샌프란시스코에서 매년 열리던 LED 관련 학회에 자주 참석하셨는데, 학회 때문에 그 지역에 방문하는 박사님을 뵙고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그는 회사가 부여했거나 본인이 회사에 발굴해 가져다 놓은 새로운 (그리고 신나는) 프로젝트를 항상 넘치게 가지고 있었다. 2005년 말 LG가 야심차게 내놓은 ‘초콜릿폰’의 시그니처였던 LED 라이트를 양산 적용하는 과정에 당시 LG의 LED 부품 개발/생산을 담당하던 LG이노텍과 연구소가 작업을 할 때에도 많은 역할을 하셨고, 그 이후에 임원인 전문위원을 거쳐 소재기술원 원장에 오른 뒤에도 박사님은 LED디스플레이, 에너지/친환경 소재 등 회사의 신사업 확장에 요구되는 기술 확보를 위해 리더로서 꾸준한  역할을 하셨다.


어느 해엔가, LED 관련 기술이 중심이 되었던 대화 가운데 그가 갑자기 함께 식사하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조명을 쭉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여기 조명들 보이죠? 그리고 밖에 나가 봐. 신호등에, 자동차 헤드라이트도 다 조명이잖아. 눈에 보이는 세상 모든 형광등이랑 백열등을 LED로 바꾸는 게 내 꿈이에요.”


그 해가 2005년이었다. 그 때의 LED란 양산 단가가 멋들어지게 나오지 않아 고가의 IT 기기에나 폼 재듯이 등장하던 그런 디바이스였는데, 집안 조명 그리고 공공재인 신호등에 효율 좋은 광원으로 쓰이는 LED의 시대를 앞당기는 것이 본인의 사명이라고 그가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한국에 돌아오고서 몇 년이 지난 2010년대 초반, 채 10년이 지나지 않아 정말로 그렇게 되어가는 세상을 문득 목도하면서, 맡은 일로부터 꿈을 꾸던 그 분은 정말 존경할 만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 분은 내가 한국에 돌아와서도, 내가 다채로이 도전해온 커리어 패스를 아주 관심있게 지켜봐 주시는 선배이기도 했다.  재료공학 전공 끝에, 전공 살려 인텔에서 연구개발에 배운 일을 쓰다가, 컨설팅이란 걸 배우며 비즈니스에 발을 들이고, 그걸 기반으로 삼성전자로 시작해 글로벌 회사, 그리고 투자사에서 지속적으로 다른 경험을 쌓아 나가는 나를 볼 때 그 연배의 한국분들이 쉽게 하셨을 법한 ‘그렇게 옮겨 다녀도 되는 거야?’ 라는 판단을 하지 않는 분이었다. 대신, 그는 나를 볼 때마다 ‘야, 그런 도전을 하다니 멋지다’는 격려를 하는 어른이었다.


LG전자에서의 삼십여 년을 뒤로 하고 박사님도 소재기술원장 임기를 마치고 퇴직하셨는데, 그 후에 찾아 뵌 그는 그 어느 때보다 후련해 보였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온 분인지 아는 내 눈에 느릿한 아침 시간, 미뤄 두었던 운동, 오랜 친구들과의 여유로운 대화, 그 친구들이 안내해 주는 음악의 세계를 탐험하며 퇴직 이후의 삶을 행복하게 누리시다가, ‘한 6개월 놀아보니 충분히 쉰 것 같’아서 전문성 살려 연구를 계속하는 방안을 찾고 있다 하시는 그의 모습도 내게는 좋은 모범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중, 그가 문득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인생을 12개월이라고 치면, 나는 지금 9월 15일에 있는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씀이셔요?”


“그 앞에 단풍이 가득하고 시원한 정말 제일 좋은 계절이 오고 있다는 게 기대되는 딱 그 시기! 그런 계절에 내가 서 있는 거에요. 그런데, 저기 겨울이 오고 있다는 것도 보여. 그것도 알고 있는데, 그래도 가을이 내 앞에 있는 것 때문에 여전히 좋은 게 지금이더라구.”


본인의 퇴직 후의 삶을 그렇게 묘사하는 분을 이전엔 본 기억이 없었다. 후회 없이 자기 길 걸어온 분은 그럴 수 있겠다 생각하며 그 역시 즐거운 모범으로 삼아야겠다 하고 있는데 박사님이 이렇게 덧붙였다.


“하박사는, 한 6월 21일쯤 되는 거 같어요.”


내가 깔깔대다가, 그러면서도 내심 기대하며 여쭸다.

“그건 또 무슨 뜻일까요?”


“한여름을 앞둔 거! 뜨거운 태양이랑 많은 비를 가지고 열매 맺고 그걸 또 익히는, 인생의 피크에 들어가고 있는 사람.”


그 날 박사님을 뵙고 돌아오는데, 그렇게 마음이 일렁일 수가 없었다. 마흔 다섯에, 인생의 피크가 이제 시작이라는 이야기를 해 주는, 그런 어르신이 주변에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안 그래도 곧 새로운 임무, 새로운 사람들을 맞이할 예정으로 약간의 스트레스와 기대를 동시에 안고 지내고 있던 내게 그 날의 ‘인생의 계절論’은 나의 매일을 돌아보게 하는 도구가 됐다. 나는 이제 한창이다. 나는 6월의 사람이다.


나도 후회없이 내 인생의 여름을 지나고서, 단풍을 맞이하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내 뒷 세대를 축복해주는 사람으로 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런 여름을 지나려면 쏟아지는 태양 아래 땀 정도는, 좀 흘려 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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