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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정희 Aug 27. 2023

자연스럽게 산다는 것이란


두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순수하게 즐거움에 빠지는 순간이 여럿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은 그 까르르 하는 웃음 소리를 들을 때였다. 그 뒤에 무엇 하나 겹쳐 보이지 않는 ‘진짜 웃기기 때문에 웃는’ 웃음은 그냥 그 자연스러움 자체만으로 나를 즐거움의 감정으로 데려다 놓곤 한다. 그것이 새삼스럽고도 즐겁게 들리는 이유는 내가 진짜 웃기지 않아도 웃는 웃음이란 것을 때때로 도구 삼아 에너지를 쓰며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른으로 살다가 어느덧 웃음도 일로 삼아야 하는 순간이 있고, 그러다가 마음 속의 상태와 드러내는 표정을 다르게 가져가느라 피곤한 것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 더해 많은 것을 머리 속에 담아 피곤한 채 어떤 명분에 집중하게 되면, 그렇게 쏟은 마음 씀과 에너지에 대한 보상 심리 때문에라도 스토리에 더 많은 채색을 하기도 하고 필요 이상의 감정 과잉으로 상황에 대응하게 된다. 그런데 무엇이든 넘치기 시작하면, 자연스럽지 않았다.


진짜 웃음을 웃으며 떼구르 구르던 시절을 지나 삼십대를 거쳐 사십대에 들어서기까지, 나의 ‘엣지’, 내가 편안한 가치, 누가 뭐래도 내가 느끼는 보람을 스스럼없이 내보이기까지, 그리고 ‘공적자아(외부인이 보는 나)’와 나 스스로의 ‘자기개념’이 화해의 손을 잡기까지 나의 어느 시절은 괴로웠고 또 어느 시절은 따뜻했다.


의도가 넘쳐 나고 그 의도를 감추는 것이 요령이 되는 시절이자 환경에서는 누가 뭐래도 내가 중하다 여기는 가치와 내가 믿는 믿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일하는 것도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 된다. 나는, 그럼에도 그렇게 에너지 쓰며 사는 게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따뜻하다고 기억에 담은 시절은, 내가 뭘 베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뭘 숨기느라 그런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한 두 사람 함께 하고 있던 때였다. 그 한 두 사람이란, 의도 없이 자연스럽게 나를 받아준 사람들이다.  ‘나를 설명하는 말’들을 정의하고자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니 더 그랬다. 가려진 의도가 없는 나를 보며 뭔가 더 없을까 파헤치는 것 없이 그저 가르치고, 함께 일하고, 성장시켜 준 존재들과의 대화는, 달리 덧붙일 설명 필요 없이 자연스러웠다. 내 부모님이 그랬고, 스승들이 그랬고, 어떤 시기의 동료와 매니저들이 그랬으며, 내 아이들이 그랬다.


그러고 보면, 나다운 상태로 자연스럽게 산다는 것에는 역시 일하는 환경 그리고 사는 환경이 빠질 수 없는 요소였다. 그래서 진부하게 들리는 결론으로 결국 돌아오게 된다. 나에게 그 존재들이 마음을 키우고 경험을 챙기는 동안 따뜻한 시절을 지날 수 있는 배경이 되어주었으니, 나도 내 아이들에게, 내 가족에게, 내 일의 언저리에서 만나는 이들 몇몇에게 자기다운 상태로 사는 배경의 역할 정도 하며 살 수 있기를.

그리고 굳이 나를 설명하는 말이 무엇이라 길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는 마음의 여유 정도 가지고 내 중년과 노년의 시기를 보낼 수 있기를.


그 바램이, 마흔 다섯 나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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