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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정희 Apr 27. 2023

내가 모르는 것이 있음을 인정하기

미국에서 학위를 하던 시절 ‘오래된 Ph.D. 농담’이라며 공대 대학원 친구들이 알려줬던 이야기가 있었다. 귀국한 뒤에도 내게 대학원 생활이 왜 중요한 경험이었는지 누군가 물어올 때 인용하곤 하던 말인데, 대략 “세상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할 때 받는 것이 학사, 내가 일부의 지식을 안다고 이야기는 할 수 있겠다 느낄 때 받는 것이 석사, 그리고 마침내 내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깨달을 때 받는 것이 박사”라는 거였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농담 같은 말이 지금까지 내게 남아있는 것은, 그 이야기가 내게는 농담이 아닌 내 대학원 생활의 요약 같아서였을 것이다.


‘공학을 전공했는데 왜 전략을(또는 파이낸스를, 또는 오퍼레이션을) 하는 자리에 있는지’ 그리고 ‘박사까지 한 일이 아깝지는 않은지’의 두 질문은 엔지니어링을 떠난 뒤 지난 십년 넘는 시간 동안 나를 끈질기게 따라다녔는데, 사실 박사를 마치고 학계에서 꾸준길을 가는 이들 중 박사 전공 테마와 결이 같은 내용만으로 연구 커리어를 쌓는 사람조차 세상에 그리 많지 않음에도 매번 새로운 종류의 일을 새로 배워 가며 살아온 것 같은 내 이력은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다소 희한해 보이기는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보는 이들에게 내가 항상 내어 놓았던 대답은, 그 오래된 Ph.D. 농담의 스토리와 비슷했다. 박사 이력이 내게 준 가장 큰 소득은, 천재에 가까운데도 인품까지 좋은 선생님들과 또래들을 목도하며 얻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겸허하게 살아야겠다는 시각, 그리고 그럼에도 박사를 끝마쳐야 하니 가지지 않으면 안되었던 :)  뭔들 배우고 알 때까지 문제를 붙들어 씨름하는 끈기였다. 그 두 가지를 큰 근간으로 삼고 보니 무슨 일을 하던지 도움이 되었던지라, 나는 나의 20대를 바쳐 학위 했던 시절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그 때 멀리 떠나지 않았으면 나는 아마도 세상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처럼 이미 오래도록 이야기하며 살고 있었을 것이다.




대학원 지도교수 Paul과 함께 반도체 재료 관련 학회 참석 차 Washington D.C. 를 며칠 간 방문했을 때였다. 그 때가 아마 그와 연구 생활을 시작한 지 2년 정도 되었을 때였고, qualifying exam(=박사자격시험: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지만, 당시 스탠포드에 박사 과정으로 입학한 학생들은 2년 간의 coursework을 마치고 나면 본인이 정한 연구 분야와 coursework 내용을 묶어 지도교수를 포함한 심사위원 3-4인 앞에서 연구 내용을 발표한 뒤 질의 응답 형식으로 수 시간 동안 평가받는 구두 시험을 치렀다. 두 번 실패하면 석사만 마치고서 학교를 떠나야 하는, 기껏 박사 해 보겠다고 학교에 들어온 학생들로서는 상당히 부담스럽고도 두려운 관문이었다)을 통과하여 이제 살았구나 싶어 안도했지만 연구는 여전히 어렵게 느껴지던 시기였으며, 특히 그 학회는 내가 본격적으로 파고 들고 싶었던 분야에서 마치 교과서처럼 공부하던 논문을 직접 쓴 유명 교수와 연구자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할 수 있어 신이 나는 자리였는데, 그런 학계 유수 인물들과 협력하며 연구 업적을 남기고 있던 지도 교수는 내게 급기야 하늘같이 보이던 그런 시기였다.

 

학회 두번째 날엔가 Paul 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어떻게 교수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지 궁금하여 그의 걸어온 길을 청해 물었다. 그 때 내 눈에 뭐든 다 아는 사람처럼 보이던 내 지도교수가 하던 말이 이랬다.

박사과정 입학 허가를 받고 MIT에 들어 갔지만, 언제고 누군가가 한 밤에 본인의 기숙사 방문을 쾅쾅 두드리며 “우리가 사실 너에게는 어드미션(Admission: 입학 허가)을 잘못 줬다는 게 밝혀졌어. 미안하지만 캐나다로 돌아가 줄래?”라는 말을 하러 들이닥칠 것 같아 매일 무서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MIT가 사실 크게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싶어서 절박하게 공부했다고 했다. 그게 캐나다의 UBC라는 유수 대학을 나와 MIT에서 박사를 마치고 스탠포드 종신 교수 자리를 막 차지한 사람이 하는 이야기였다.

그 말을 듣던 저녁엔 그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내 자신이 당시의 Paul보다 많은 나이가 되어 당시의 내 지도교수의 모습을 돌아보니 ‘나는 뭔가 부족한 사람일 수 있다’는 자각이 그가 보여준 발전의 원동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부족이란 말의 뉘앙스가 좋지 않게 들릴 수 있으나, 꼭 그렇지는 않다. 굳이 설명을 보태자면, 그건 열등감이 아니라 그가 생생한 호기심을 유지하는 비결 같은 것이었다. 당시 학계에서 나름 인정받고 있던 본인의 주요 연구 영역에서 새로운 분석 방식이나 계산과 해석 등을 새로이 접하게 되면 Paul은 매우 흥미로워 했다. 그가 다른 교수나 타 학교의 학생들에게 질문하는 것을 가만 관찰해 보면, ‘이것은 나에게 새로운 것이니 내가 여태 뭘 몰랐는지 기본이라도 알아 놓고 이 자리를 떠나겠다’는 의지가 보인달까. 그것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흥미로웠다.


연구 영역을 확장하는 데에도 그의 이런 자세는 도움이 되었다. 우리 연구실에는 Paul과 화학공학/전자공학/기계공학과 등의 타 과 교수와의 공동연구를 하며 학위를 이어가는, Co-Advisor(공동 지도교수)를 모시고 있는 학생들이 나를 포함해 서넛 되었다. 나는 기계공학과에서 Computational Material Science를 하시는 교수를 Co-Advisor로 삼아 반도체 소자 박막 재료에 대한 실험 분석과 이론적 해석을 병행하는 연구를 테마로 삼았는데, 그는 내가 다른 advisor의 그룹에서 배운 시각을 알려줄 때, 특히 분석결과를 해석하는 새로운 이론적 용어(또는 스토리)를 소개해 주면 마치 어린이처럼 좋아했다. 나와 같은 연차였던 인도인 동기는 화학과 교수와 함께 나노와이어(nanowire, 수 나노미터 직경의 기둥 모양 물질을 합성하고 컨트롤 할 수 있는 컨디션을 찾는 것 자체가 당시에 주목을 크게 받는 연구 영역이었다)를 공동 연구했고, 아래 연차 미국인 친구는 기계공학과 교수를 Co-Advisor 로 하여 연료전지 재료를 박사 연구 테마로 삼았다. Paul은 그런 식으로 타 학과 교수와의 다리가 되어주는 학생을 키우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빠르게 확장해 나갔다. 보통 그런 일의 시작은, 본인도 하고 싶고 학생도 하고 싶은 연구 부문인데 본인이 경험이 없어 더 배워야 겠다는 타 학과 교수와의 대화였다.

어떤 이들은 그가 Co-Advisor 제도를 활용해서 학생에게 반만 돈을 쓴다며(이런 경우 박사 한 명 키우는데 필요한 학비, 월급으로 주는 생활비, overhead((교수가 외부에서 연구비를 획득해 오면 대학이 시설 운영비/공동 인건비 등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일정 비율을 반드시 떼어간다. 아마 국내에서는 간접운영비라는 이름일텐데, 국내 국외 할 것 없이 교수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는 비율이다)) 등을 타 학과 교수와 공동 부담을 하면 된다) 그닥 좋지 않게 말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것을 그의 겸허함과 배움의 방식이라고 이해했다. 내가 옆에서 오래 관찰한 그는, 본인이 아직 전문가가 아닌 분야에서 먼저 걸어가고 있는 이들 앞에서 확실한 존경을 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근래에 만난 어른에게서도 놀라운 점을 보았다.

글로벌 임팩트 투자 scene에서 대표적인 thought leader로 불리우는Jed Emerson은 ‘The Purpose of Capital’이라는 저서에서 “답을 모두 아는 전문가, 섣부른 조언과 전략보다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왜’라는 근원적인 질문”이라는 내용으로 첫 챕터 수십 페이지를 채우고 있다. 임팩트 투자, 또는 요즘 더 알려진 말로 표현하자면 ESG 투자라는 것이 이른바 유행처럼 번지면서 자본이 ‘왜’ 방향을 바꾸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이유를 생각할 틈이 오히려 사라지고, ‘어떻게’ 하면 투자할 만한(그러면서 기왕이면 사회와 환경에도 좋은 효과를 내서 투자자 스스로 그저 뿌듯하게 해 주는) 자산을 찾아 (결국엔) 재무적 성과로 증명할 수 있는지의 논의로 관심이 쏠리는 데 대한 지적이었다.

사실Jed는 자기 자신이 답을 잘 아는 전문가라고 본인 입으로 이야기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주류 금융과 임팩트 투자를 드나들며 명민한 시각을 갖춰 임팩트 투자자들에게 영향력을 끼쳐 온 guru인지라 ‘어떻게’라는 주제로 하루 종일 강의를 해도 거부감이 없을 인물이다. 그런데 2022년 가을, 내가 몸 았던 회사(D3쥬빌리 파트너스)가 개최하는 임팩트 투자자 포럼 ‘D3 아시아 임팩트 나이츠’에서 귀한 기회로 만난 Jed는 섣부른 조언으로 강연을 채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별도 세션에서 십여 명의 참석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그는 그 시간을 ‘왜’에 대한 질문들을 주고서는 참석자들이 저마다 자본을 둘러싸고 경험해 온 자기 고백적 이야기를 할 때 참석자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생각의 흐름을 이끌어주는 데에 대화의 기술을 썼다. 그러고서 그 자리를 통해 많이 배워 고맙다 했다. 조언과 잔소리를 가장 많이 해도 될 권리쯤 가지고 태어난 것 같은 권위자의 몸에 밴 겸허함은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까지 겸손하게 만드는 경험이었다.




사회 생활의 여러 면을 거치다 보면 왠지 모를 믿음이 가기 전까지는(사실, 믿음이 처음부터  가는 경우에도 근거가 딱히 있지는 않다) 일단 상대가 하는 말에 오류가 있을 것이라 먼저 가정하고, 그 가정이 잘못되었음을 상대가 증명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흘려 보낼 때가 왕왕 있다.  오류가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며 사는 것은 내가 왠만하면 ‘쫌 아는’ 쪽임을 과시해야 될 것 같아서가 아닐까 싶다. 은연 중에 우리는 그 방식에 익숙해 있다.

학위를 하면서 내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가지게 되었던 삶의 시각에서 벗어나 나 역시 어느 새 바뀌어  '쫌 아는' 사람 포즈를 취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흠칫 놀라곤 한다. 새로운 분야에 몸담아 성장하는 과정에서는 내가 배워야 할 것이 있고 빈 곳이 있다는 것을 아는 자각의 자리로 돌아가지만, 시간이 지나면 타인이 불러주는 박사라는 이름이 주는 안온함에 다시 길들여지고 경험이 ‘쫌 있는’ 사람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안락함에 어느 새 젖어 내가 많이 아는 것과 같이 말을 하게 된다.

배움의 자세를 잊지 않게 해 주는 인식, 내가 내어놓는 답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자각은 의식하지 않으면 나이를 먹어가며 희끄무레 해다...  그 인식을 유지하는 비결이 뭘까,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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