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언급한 사건을 계기로 본인의 의견을 내는 것에 자신감을 가지기 시작한 첫째 딸은, 그후 초등 1-2학년 시절 동안 자아상을 스스로 그리는 데에 신나게 골몰한 나머지 오히려 상황에 맞지 않는 어깃장을 놓다가 아주 혼쭐이 나곤 했다.
그 후 우리 가족 나름의 역사를 거치며 여러 혼쭐과 협상을 거쳐 상황을 읽고 배려와 공격의 수위를 조절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고 나니 사춘기 초입에 들어선 지금의 아이는 오히려 부모와 말이 잘 통하는 존재가 되었는데, 초1-2 시기에 사춘기 전쟁을 마치 미리 겪는 것 같았던지라 당시 딸-엄마 사이 벌이는 전투가 꽤나 잦았다.
그 시기의 어느 일요일, 두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 가던 중 차 안에서 무언가 사소한 일을 두고 또다시 어깃장을 놓는 첫째를 혼내다 못해 크게 화를 내고서(‘아이를 혼내는 것’과 ‘아이에게 화내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어른이 아이에게 내는 화는, 그 순간에 대한 패배 또는 포기와 비슷하다) 차에서 내리게 했다. 보통은 첫째를 초등부실로 (다정하게) 데려다 준 뒤 한참 어린 둘째를 유아부실로 안고 가 내려주고서 어른예배에 참석을 했지만, 노기가 가시지 않은 나는 그 다정함의 과정을 생략하는 걸로 치사한 분풀이를 하기로 했다.
첫째를 그렇게 보내 버린 뒤, 그 소극적 분풀이로도 여전히 마음을 진정 못하고 침잠해 있는 내 품에 안겨 유아부로 가던 둘째가 가만히 물었다.
"아까 차에서 언니한테 왜 화냈떠? "
"... (한참 할 말을 찾다가) 엄마가 하지 말라는 것 계속 해서.
(할 말을 더 찾다가) ... 하지 말라는 건 안 하면 되는 거야"
"...."
뭔가 다른 말을 기다리는 것 같은 하윤이에게
".. 엄마가 그래두 너무 화냈어?" 했더니
아이는 "응... 엄마가 너무 화내서 내가 딸국질이 나자나"
뜨끔했다.
".... 알았어, 엄마가 화 덜 낼께."
언니가 혼나는 것을 여러 번 보았어도 둘째가 그렇게 ‘왜 너무 화냈냐’고 이유를 물은 적은 없었다. 유치원도 들어가지 않은 아가에게도 엄마가 언니를 혼내는 것과 혈기에 차 화를 내는 것은 분명 달랐던 것이다.
아이의 상황 그대로를 반영한 투명한 질문에 마음이 희한하게 금방 진정 되었다. 그리고는 불뿜는 용(두 아이가 내게 붙여준 별명)에서 엄마로 돌아왔다.
첫째가 초3이었던 가을 어느 밤에, 아이가 뜬금없이 한참을 제 방에서 들쑤석 거리며 나오지 않더니, 작아져서 못 입을 옷들은 걸러내고 쓸 만하게 입을 옷들만 서랍과 옷걸이에 나름의 구역 별로 잘 정리하여 나타났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잘 해 낸 것이 꽤 기특해서 당연히 칭찬을 해주었고, 나름의 성취감이 있었던지 첫째는 그 날 입꼬리가 잔뜩 올라간 채 으쓱댔다.
며칠 지난 토요일 오전, 점심 준비를 한참 하는 동안 도우미 이모님이 평일 동안 쓰는 방에서 두 딸이 한참을 조용히 하고 있기에 뭔가 불안하다 싶었다. 들여다보니, 아… 내가 왜 칭찬을 해 주었던가 싶은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유치원생 둘째의 옷이 그 방 벽장과 서랍에 다 들어 있는데, 성취감에 고무되신 우리 큰 언니께서 동생의 옷가지를 정리하겠다며 어련히 알아서 깔끔히 정리되어 있는 동생 옷장을 다 (정말 다, 모두 다) 헤집어 놓은 거였다.
“야!” 라는 큰 소리가 먼저 쑥 나갔고, “내가 할 수 있다구” “언니가 시켰어” 등의 볼멘 소리가 오고 가던 새에 “정말 너희 둘이서 도로 정리해 놓는 거야, 밥부터 먹어!” 하는 말로 으름장을 놓고 일단 혼돈의 도가니에서 일단 모두 철수. 한숨과 후회에다 저걸 언제 다 정리하지, 과연 내게 주말의 평화란.. 하는 생각으로 머리 속이 잠시 가득 찼다가, 일단 문을 닫아 놓고 숨을 고르는 편을 택했다.
낮 동안에 방치해 둔 (사실 마음의 평화를 위해 애써 회피하고 있던) 폭탄 맞은 방에 큰 아이가 저녁 후 다시 들어가 뭔가 일을 시작하려 하기에,
“손 대지마! 엄마가 딱 알아보는 방식으로 정리가 돼야 동생 옷 입힐 때 수월하다구.” 라고 했더니,
큰아이가 잠깐 멈췄다가 이렇게 가만히 물었다.
“엄마, 왜 어른들은 말이 그렇게 바뀌는 거야?”
질문에 괜히 뜨끔하여 되물었다.
“그 질문은 지금 왜?”
“엄마가 아까는 우리 둘이 정리하라고 맡겼잖아. 근데 지금은 왜 하지 말라는 건가 해서. 아빠도 그래. 뭐 하랬다가 다음엔 하지 말래.”
하나도 틀린 말 아니므로 어른을(혹은 부모를..) 궁색하게 대변해 보았다.
“…엄마 아빠 포함해서 어른들은, 한 번 말을 할 때에도 나중에 벌어질 일을 미리 생각해야 할 때가 있어. 그래서 머리 속에 시나리오 여러 개가 항상 왔다 갔다 하고, 그러다가 말이 바뀌기도 하는 거지.”
사실 생사를 가르는 일도 아닌 (둘째의 옷을 효율적으로 금방 찾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몇 십 초 정도가 달린) 문제 때문에 아이가 보란 듯 무언가 스스로 일을 찾아 해 보겠다는 것을 윽박질러 못하게 해 놓고, 그것을 미래에 벌어질 일을 미리 생각하는 어른의 깊은 고려 정도로 치환하여 이야기하자니 참으로 궁색했다.
“엄마, 나는 그럼 어른 안 될래. 머리가 복잡해서 터질텐데 어른 되는 게 그런 거야?”
할 말이 없었다.
그후로, 아이들 앞에서 최소한 아침 저녁으로 말을 바꾸는 일은 줄여(없애는 것은 정말 힘들다…ㅎㅎ)보고자 노력하고 있다…
내 아이들의 질문이 나로 하여금 때때로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유는, 그 질문 뒤에 숨은 의도가 없이 투명하기 때문이었다.
그 상황 안에서 그것 그대로가 궁금하여 던지는 두 아이의 투명한 질문들은 나 자신이 어떤 감정에 휘둘리거나 내가 당연히 옳다는 가정 아래 사로잡혀 있을 때, 또는 심지어 외로운 시간에 놓여 있을 때에도 의도 없이 투명한 창을 통해 나를, 내가 한 말을, 내가 들어가 있는 상황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자리로 종종 끌어다 놓았다.
‘엄마 언니한테 왜 화냈떠?’는 ‘거기서 화내면 안되지’ 라든가, ‘엄마라면 그러면 안되지’라는 판단이 없고, ‘엄마가 너무 화내서 내가 딸국질이 나자나’는 비난 한 점 없는 지금 본인의 상태에 대한 표현이다. ‘어른들은 왜 말이 바뀌는 거야?’ 뒤에는 ‘말이 바뀌는 것을 보니 당신은 믿을 수 없다’는 가치 판단이 아닌 아침과 저녁 사이 또는 며칠 사이 바뀌는 부모의 말에 대한 진짜 궁금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던지는 질문은 종종, 뒤에 무슨 의도가 있을까 장막을 애써 걷어내거나 주관적인 판단이 들어가야 할 필요가 없이 지금의 나를 비추는 거울 같다. 그 거울 때문에 나는 번잡한 마음의 자리에 있다가도 일시에 평안한 상태로 돌아오곤 했고, 그 자체로 많은 위로가 되었다.
어른이란 사람들은 머리와 가슴이 가득 찬 나머지 질문 안에 이미 바라는 답이 있고, 의도가 세팅 돼 있는 경우가 차고 넘친다. 질문에 요령 있게 의도를 담아 전달하는 것도 능력인 사회가 되다 보니 질문을 받을 때에도 먼저 방어할 생각을 해야 하고, 투명하게 대응해도 되는지 판단이 되지 않을 때는 내 패를 다 보여주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조언을 받으며 산다. 의도와 의도하지 않은 것의 경계를 일상적으로 접하는 어른들 사이에 종종 일어나는 일은, 의도가 없는 이 앞에서도 미리 의도를 고려해 넘겨 짚고, 필요 이상 조언하고, 쓸모 없이 비난하고, 함부로 말하게 되는 일이다.
의도없이 질문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지만, 이미 어른의 말에 익숙한 또다른 어른으로서 투명한 질문만으로 상대가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게 해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은 내게도 이제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한 일이 됐다. 그럼에도, 미리 넘겨 짚지 않고 지금 현재를 보면 그대로 받아들일 만하고 칭찬할 만하며 아껴줄 만 한 일과 존재가 많이 보인다. 그런 발견으로 삶을 밝힐 수 있다면, 그 정도의 에너지는 쓸 만한 가치가 있다… 그래서, 시간이 더 흘러도 내가 그런 이로 살고 내 주변에도 그런 이들이 남아 있기를, 가만히,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