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는 유치원, 작은 아이는 어린이집 생활을 하던 시절, 당시 출근에 편도 한 시간의 통근이 필요했던 나는 등원을 도우미 이모님에게 맡기고서 아이들보다 항상 먼저 집을 나섰다가 항상 나중에 귀가했다.
사무실도 집에서 가깝고 업무 시간도 보다 유연하게 가져가는 환경과 마음 상태에 있는 지금은 두 아이 모두 낮 동안 어딘가에서 일하고 있는 엄마를 여유 있게 받아들이지만, 큰 아이가 초등생이 되기 전의 나는 한창 쫓기듯 일하며 생활하고 있었던지라 그 때의 첫째에게는 엄마와의 시간이 항상 아쉬웠을 것이다.
"엄마, 어른들은 왜 일을 해야 돼?"
출근을 위해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나를 배웅하려고 내 허리를 꼭 껴안고 있던 아이가 내게 문득 물었다.
엄마 회사 가지마, 엄마 오늘 나랑 있어, 엄마가 나 유치원에 데려다 줘, 내가 하원할 때 차 밖에서 엄마가 나를 맞아줘, 등의 많은 것을 말하고 싶었겠지만, 당시의 일곱 살 큰 딸은 가끔씩 그 모든 생각과 궁금증을 한 두 마디 질문으로 함축해서 내게 뜻하지 않은 생각거리를 주곤 했다.
"... 자기 이름을 지키려고 일을 하는 거지. 엄마도 '누구 엄마'라는 이름도 사랑하지만 '하정희'라는 이름으로도 살았으면 좋겠거든."
일곱 살 아이가 이해하기엔 세월이 너무 많이 담긴 답이 내 입에서 툭, 하고 나왔다. 아마도 그 즈음, 이름과 존중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던 시기여서도 그랬을텐데 일곱 살 딸에게는 소화하기 어려운 엘리베이터 토크 앞에 아이는 잠깐 생각하다 따뜻하게 나를 한 번 더 꼭 껴안고서 회사로 보내주었다.
장면 (2)
아이가 유치원, 학원, 학교 등에 가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부모들은 본인의 이름 대신 ‘OO이 어머님’ 'ㅁㅁ 이 아버님’ 등으로 불리우기 시작한다. 직장이라는 외부 활동을 하는 대다수의 아빠들은 육아의 영역에서 ‘누구의 아빠’로 불리우다가도 집 밖을 나서는 순간 ‘무슨무슨 일을 하는 아무개 씨’로 금새 돌아오지만, 보통 집안의 양육 대표자가 되는 엄마는 유치원 및 학교 선생님들을 만날 때, 학원/체육활동 현장에 갈 때, 그 뿐 아니라 그러한 공간에서 만나는 아이 친구들 엄마를 만날 때 조차 ‘OO이 어머님’ 또는 ‘OO이 엄마’로 사는 것이 점차 일상이 된다. 누구도 엄마의 본명을 굳이 묻지 않고, 엄마들도 자기 자신을 ‘OO이 엄마’로 소개하며, 스스로의 카톡 프로필명을 ‘OO맘(mom)’으로 올리는 것도 자연스러워진다.
어느 순간 훅 하고 들어온 ‘누구 엄마’라는 대명사가 내게는 사실 낯설었다. 나는 아이와 같은 반 친구의 이름 말고도 그 엄마들의 이름이 진심으로 궁금했다. 나는 사람들의 이름을 익히면서 그 사람은 그 이름처럼 생겼구나 하는 상상을 하는 버릇이 있는데 (때로는 ‘와, 그 사람은 진짜 **이처럼 생겼구나’ 라는 감탄을 하기도 한다 :)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 있다), ‘OO이 엄마’ ‘ㅁㅁ 엄마’라는 대명사는 그 사람의 얼굴과 잘 붙지 않아 기억하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역시 ‘OO이 엄마’로 누군가를 이름 지으면, 그 사람은 OO이와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그 사람 자체만을 바로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아이 둘을 낳으며 휴직을 잠깐씩 하면서 ‘전업 주부’ 생활을 짧게 경험한 내가 엄마들의 그 숱한 스토리를 모두 담을 수는 없지만, 전업 기간은 내 자신의 identity와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챙기지 않으면 쉽사리 마음이 힘들어지는 시간이었다. 생명을 양육하고 가정을 일구는 정말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음에도, 내 이름을 불러주는 이가 없는 일상에서 내 존재와 가치를 내 스스로 끊임없이 상기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내가 내 이름 위에 나 스스로 나 다운 색을 칠함으로써 나의 identity를 보다 수월하게 지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되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했다.
나같이 오랜 기간 일해 온 사람에게는 워킹맘이라 힘들겠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 어찌 그렇게 일을 포기 안하고 성장해 왔냐고들 묻는 일이 많지만, 나는 결혼 후 자녀와 가정에 온전히 집중하며 ‘누군가의 엄마’로 이십 년 가까이 살아온 친구들이 존경스럽다 말해왔고 지금도 그 말은 진심이다. 전업 주부 생활이 훨씬 더 어려운, 더 마음을 써야 하는 일이다.
장면 (3)
내가 나고 자라 학위를 위해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산 곳(지금은 내가 풍습에 따라 ‘친정’이라 부르게 되는)은 서울 강북 지역, 그 중에서도 수유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동네이다.
엄연히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이라는 행정구역명이 있고 더 이상 이장님이 사는 곳이 아님에도 수유리는 종종 수유리로 불리웠다. 북한산의 정상인 백운대와 인수봉 절경이 그대로 올려다 보이고, 뒷산이라 부르던 산이 사실은 북한산 국립공원 자락인 나의 친정집은 아파트 숲 속에 살고 있는 우리 두 딸에게 진심으로 정겨운 시골 외갓집이다. 누군가 내게 출신지를 물어보면 그 정겨운 마음을 담아서 ‘나는 수유리 출신’이라고 이야기한다.
나의 유년기와 청년기 성장에 있어 큰 부분을 차지했던 교회는 수유리 주택가에서 20여 년의 역사를 거치며 무려 수 천 명의 교인이 모이기까지 성장한 교회였는데, 그 안에서 활동하는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들의 배경은 참으로 다양했다. 워낙 그 곳이 교육 배경, 소득 수준, 직업 등에 있어 구성이 다채로운 주민들이 오랜 역사를 거쳐 섞여 살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그랬다. 동네 시장에서 과일가게, 야채가게, 철물점, 떡집을 등 운영하시던 부부들, 분식점 주인 아주머니 또는, 옷가게 주인 아주머니, 집수리 업체 아저씨부터 어디 대학교수라고 하던 아저씨, 알고보니 거대 기업 초고위 임원이었던 아저씨, 여러 군데의 초중고 선생님들, 그리고 우리가 ‘전업 주부’라고 쉽게 부르던 모든 엄마들.
매주 금요일 점심 즈음 동네 별로 열렸던 주부들의 주중 교회 커뮤니티 모임(‘구역예배’라고 불렀다)에 따라가 보면(미취학 아동 시절의 나는 엄마를 따라 매주 구역 예배에 가서 노는 동네 아이들 중 하나였다) 그들이 사는 집의 형편도 정말 다양했다. 다세대 주택 반지하, 낡은 외딴 집, 꽤 괜찮아 보이던 이층집이나 심지어 삼층집, 동네에서 새로 생겨 깔끔했던 아파트, 등.
그 다채로운 배경을 가진 이들이 교회 안에서는 교육배경과 소득수준, 직업과 상관없이, 오로지 교회에서의 활동 정도에 기반하여 OO집사님, ㅁㅁ 권사님, ** 장로님이라 불리웠다. 사농공상의 낡은 인식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던 시대에 생계를 꾸리며 이리저리 마음 상하는 일이 숱하였을 여러 구성원들에게, 교회가 찾아주는 자신의 이름과 울타리는 참으로 따뜻했을 것이다.
본인의 의지보다는 사회적 인식에 따라 자연스레 주부가 되었으나 자신의 이름을 잊고 사는 것이 사실은 성에 차지 않거나 또는 생계 유지라는 일상의 고단함으로 마음이 피곤한 여성들에게도 교회의 커뮤니티 활동은 큰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교회는 평일에도 주부들이 중심이 되는 ‘구역’을 중심으로 많은 일을 치러냈다. 동네 별로 조직되어 있는 구역은 각 구역을 이끄는 집사, 그렇게 모인 구역이 십 수개 모인 교구와 교구를 지도하는 권사들을 중심으로 성경과 신앙이라는 꾸준한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 배운 것을 구역예배라는 모임을 통해 구역원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기쁨을 부여하고, 여러 형태의 봉사 활동을 통해 리더십을 발휘할 기회를 제공하고, 바자회라는 행사를 중심으로 경제 활동에도 참여하게 해 주며, 장례 등에 필요한 제반 절차에 꼬박 함께 하는 가족으로서 기능했다.
그 가운데에서 교회의 엄마들은 서로를 본명으로 불렀다. 동네 주민들에게는 ‘**이 엄마’로만 알려져 있는 사람이지만, 그 분들은 교회 안에서만은 OO집사 또는 ㅁㅁ권사라고 서로를 부르고 또 자신을 소개하며,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살았다.
나도 교회의 많은 친구들과 지내던 가운데, 그들의 부모님을 ‘내 친구 누구의 엄마’ 또는 ‘누구 아빠’ 로 인식하기 이전에 ‘OO권사님’ 또는 ‘ㅁㅁ 장로님’으로 이름을 기억했다. 그렇게 한 결과로,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친구의 부모로서가 아닌 그 분들의 이름과 특징이 지금도 그대로 떠오른다.
내가 기억하는 순간부터 집사님이었고 구역장이었으며 추후 권사도 하며 고등부 주일학교 선생님이셨던 우리 친정 엄마를 따라, 어린 나는 구역 예배를 주마다 따라 다니며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목청껏 찬송가도 부르고, 바자회라는 경제 활동에도 참여(당연히도, 구경일 뿐이지만)했다. 엄마가 해당 지역 교구 멤버로 챙기시던 옆동네 독거노인 할머니 댁에 함께 방문도 했고, 그 할머니가 고맙다며 챙겨주셨던 기가막히게 투명하도록 빛깔 고운 식혜를 감탄하며 마시기도 했고, 언젠가 홀 몸인 본인의 장례를 챙겨 달라며 엄마에게 몇 가지를 부탁해서 실제로 시간이 흘러 그 분이 돌아가셨을 때 엄마가 그리 챙기셨던 것도 알고 있다. 그 할머니도 OO이라는 이름의 할머니였다. 혼자사는 동네 할머니가 아닌, 어린 나도 알고 있던 할머니의 이름.
엄마는 또한 교구장 권사로서 백 명 이백 명 되는 교구 사람들을 이끌고 교회 발표 행사를 기획하고 지휘하며 행사 감독의 역할을 하시기도 했다. 진심으로 마음을 다하고, 에너지를 충실히 쓰며 눈을 빛내던 엄마의 모습을 몇 십 년 지난 오늘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중학교 선생님도 하셨고 등산을 좋아하셔서 전국에 오르지 않은 산이 없을 정도로 여행을 사랑하던 엄마가 결혼과 출산 뒤 나를 키운다고 학교를 그만 두고 가정에 머물기로 결정하셨던 것인데, 이미 엄마의 지혜와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던 나는 엄마가 하정희 엄마 말고도 엄마의 이름 석자로 불리우며 리더십을 맘껏 발휘하셨던 그 교회가 그래서 고마웠다.
한국의 개신교가 '60년 대를 거쳐 '90년 대까지 크게 부흥했던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구성원들에게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살 기회를 부여해 준 것에도 큰 공이 있다고 본다. 한국 교회의 여러 공과(功過)를 내가 여기 다 논할 수는 없지만, 예수께서 큰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을 굳이 찾아가 각자의 이름을 부르며 그 존재들을 위로하시던 장면에 부합하는 역할을, 교회가 그래도, 분명, 한 때 수행을 했다.
다시, 장면 (1)
출근 길 엘리베이터 앞에서 뭔 말인지 알 턱이 없을 답을 아이에게 남기고 떠나면서, 내가 지키고 싶은 이름의 색은 무엇일까 생각했었다.
딸아이가 어린이 답게 던진 ‘어른들은 왜 일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이름 어쩌구 하는 대답이 나온 것도 그게 그 즈음 내 안의 주요 생각꺼리였기 때문이었을 텐데, ‘일이란 내 이름을 지킬 수 있게 해 주니 좋은 것이다’라는 대전제와는 별개로 날 것 그대로인 듯한 상황을 때로 만나고, 가끔씩 희망과 무기력 사이 그 어디쯤에서 헤매이기도 하기도 하는 일 가운데 당시의 나 자신이 간절히 어떠한 설명을 원했던 것 같다.
지금 가만 돌아보니, 아이가 던진 ‘어른들은 왜 일을 해야 하느냐’의 질문에, 돌고 돌아 내가 찾고 있던 답은 그저 이름으로 대변 되는 것 뿐인, 남과 나에 대한 존중이었다. 굳이 일이란 것으로 그 이름을 지킨다 애써 말하지 않아도, 그 이름 위에 굳이 존재감을 덧씌우려 애쓰지 않아도,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대하지 않고 그 이면을 보며 사는 존중.
일단, 그리하여.. 사람을 만나 그 이름을 기억하고 부르는 것에 계속 충실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번 더 삼켜 본다. 그리고, 나이들수록 좀 더 까탈스러워지는 성질을 한 번 더 부여잡고, 함부로 사람을 보지 말되 각자의 존재를 한 번 씩 더 들여다 보는 여유 정도는 가져야겠다. 내가 내 어린 시절 사랑했던 그 교회의 역할까지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사람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온기 있는 사람의 역할 정도는.. 내 중년과 노년에 지속할 수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