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성인이 되면서 딸에 대해 칭찬하는 이들 앞에 부모님이 나에 대해 꼭 하셨던 말씀은 ‘알아서 잘 자라줘 고맙다’는 이야기였다. 여기서 한단계 더 들어가자면 아빠는 ‘나는 한 일 없고 엄마가 다 키웠다’라고 공을 돌리시고, 엄마는 ‘정희는 알아서 컸다’라고 대견해 하시는 스토리였는데, 딸 둘 엄마의 입장이 된 지금의 나는 그것이 모든 부모가 표현하는 흔한 방식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작은 인간(내가 가끔 쓰는 우리 딸들에 대한 표현:) )을 양육한다는 것은 어떤 모양과 입장으로 헤아려도 시간과 체력과 마음의 품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라서, 아이를 키운 수고에 대해 본인의 공이 드러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 부모의 마음 한 켠에 자리 잡게 마련이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부모가 내게 돌려주신 나의 ‘알아서 자랐다’는 스토리는, 두 분이 타인(딸을 포함한 타인: 가족 구성원도 존중이 필요한 ‘타인’이다)에 대한 근원적인 겸허함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이라 쓸 수 있는 표현이라고 이해한다.
당신들께서 그렇게 이야기하시는 배경은, 우선적으로는 내가 청소년기며 20대 초반을 거치는 동안 부모의 통제와 관여가 깊숙히 있어야 한다고 보통들 이야기 하는 주요 관문마다 나 스스로 최종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린 나를 키우시는 과정에서도 부모님은 숙제해라 공부해라 몇 등 해라 어느 학교를 가라 뭘 입어라 이런 남자를 만나라 만나면 안된다 하는 분들이 아니었고, 내가 정한 방향과 선택 및 그 결과에 대해 정서적 지지를 보내는 것에 더 가치를 두는 분들이었다.
그 와중에서 부모님 잔소리 없이 생겨난 내 공부 버릇은 어디에 근원이 있을까를 돌아보자면, 아빠가 매일 퇴근 길에 회사 내 서점에서 책을 두어 권씩 꼭 사들고 들어와 책에 메모를 해 가며 깊숙한 독서를 하는 분이었고(50% 이상 정리하신 뒤인 수유리 부모님 집의 책장에는 지금도 책이 수천 권이고, 아빠는 요즘도 공부가 일상이시다), 교회에서 오래도록 평신도 성경공부 그룹 리더이자 주일학교 선생님이셨던 엄마도 식탁에 앉아 성경과 관련 서적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던 분이었다는 데에 뿌리를 두고 있지 싶다. 그런 엄마 아빠를 보며, 어린 나도 옆에 앉아 뭐든 읽고는 했다.
그런 부모와 함께 있으면, 일정 부분 부담스러운 결정을 앞에 두고서 기실은 부모님이 어느 정도씩 내게 무엇이든 강요를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마음에 부담이 있을 때 그런 소망이 고개를 드는 건 사실 일이 잘못되었을 시 탓할 대상을 찾고자 하는 심적 보험과 맞닿아 있다. 그런 스스로의 바램을 알아채면서 나는, 매일의 소소한 일상과 삶의 크고 작은 관문 앞에서 내 일을 내가 결정하는 나 자신에게로 돌아오곤 했다.
그건 누구를 칭찬하거나 탓할 일 이라기 보다는 그저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기질과도 연관이 있었던 것 같다. 요즈음이야 아이의 기질에 따른 교육 방식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보편화 되었지만, 그런 정보가 부족했던 시기에 교육학이든 심리학이든 전공하지 않은 내 부모님은 의도하셨든 하지 않으셨든 이런 기질의 나를 적절히 대하셨고, 그런 의미로 볼 때 나의 부모님은 한 세대 앞서 간 분들이었다.
그런 환경 아래에서 나는 ①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내가 정의하고, ②그러한 내 자신이 할 일은 내가 정하는 것(그것이 소소한 일상이든 크고 작은 관문에 관한 것이든)이 점점 더 편안한 사람으로 자라왔다. 내가 30대 초 크게 겪었던 마음 속 괴로움과, 공적자아(외부인이 보는 나)와 자기개념이 편안하게 악수한 40대에 들어서면서 불쑥불쑥 만나곤 했던 마음 속 불 같은 것들은, 가만 돌아보면 그 두 가지 중 최소 하나가 지켜지지 못할 경우였다.
30대 초의 괴로움은 ‘그런 일을 하려면 당신이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는 넘쳐나는 조언 앞에서, 나 자신을 내가 정의할 기회가 박탈되고 있음에 마음이 필요 이상 흔들렸던 데에 기인했다. 필요 이상 흔들리지 않을 근거를 챙길 시간과 마음의 용기를 좀 더 챙길 수 있었다면, 아마 30대 초반의 폭풍은 조금 수월했을 것 같다.
반대로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괴롭지 않은 것이라 받아들인 40대의 나는,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이들에 대한 존중에 앞선 ‘내가 해 봐서 아는데 이것이 진리’라 말하는 섣부른 정의 앞에 마음 속에 불이 일곤 한다. 이제 내게 때때로 요구되는 것은 필요 이상 confront 하지 않을 차가운 머리가 됐다.
그래도 오늘의 나는, 괴로워하던 과거의 나와 참지 않고 맞서는 지금의 나 모두, 내 부모가 나를 일찍부터 한 인간으로 존중해 주어 지키고 또 더 키울 수 있었던 기질에 기반한 것임을 이해하고 있다. 주변 상황을 다루는 데 미숙했던 시기에 소위 ‘이불 킥’ 할 시간을 가진 적도 있었으나, 그래도 본래의 나라는 사람의 과거를 그럴 수도 있던 거지 하고 돌아볼 수 있게 된 오늘의 마음의 품을 감사한다. 괴로운 시간 한 복판을 걸을 때에도 결국 내 맘 속 평화의 자리에 돌아오게 한 것도 부모가 내게 변함없이 주신 믿음이었다는 것도 감사하다. 알아서 클 리 없었지만, 알아서 자랐으며 지금도 그러한 딸이라고 정의해 주신 그 믿음.
40대도 반을 넘어서면서, 이제는 내 아이들이 알아서 자랄 수 있도록 마음의 공간을 주는 부모가 되고, 주변 이들에게는 귀 따갑지 않게 편안한 곁을 내 주는 사람으로 존재해 줄 때가 됐다. 그러려면 내게 주어진 기질과 성질에서 더 나아가, 때때로 차가운 머리로 기다릴 지혜와 무겁게 입을 닫을 줄 아는 가슴 속 타이머를 더 키워야 한다.
사람은, 계속하여 '알아서 자라야' 하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