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대문
1980년, 삼성동 파란 대문 집으로 이사를 왔다.
이사를 오자마자 아빠는 거리 쪽에서 잘 보이게 대리석 문패를 달았다. 이. 벽. 성.
그리고 마당을 향해 양쪽으로 열리는 큰 문 두쪽과, 현관 쪽 계단으로 이어지는 출입문 한쪽을 포함해 대문 세 쪽을 모두 진한 초록색으로 칠을 했다.
한 번이 아니라 며칠에 걸쳐 두 번 세 번을 칠했다. 집안에서는 밖이 보이나, 밖에서는 안이 안 보이도록 요란하게 꼬인 무냥을 낸 철제 대문이다. 철제 사이사이 안과 밖 구석구석 칠 하는 게 여간 까다롭지 않았으련만 아빠는 정성스레 붓칠을 한다. 뒤에 가서 한번 보고, 다가서서 두 번 보고, 갸우뚱 다시 보고... 몇 번이고 두껍게 덧칠을 했다.
대문을 새로운 색으로 바꾸려는 것이 아니다. 원래 색을 없애려는 목적이다. 행위는 경쾌한 붓질이지만 속내는 전 주인의 작은 흔적조차 덮어 버리려는 안간힘이다. 경건한 의식과도 같은 절차다.
삼성동 집으로 이사를 오기 전 아빠 엄마는 열 번은 족히 이사를 했다. 연신네, 불광동, 방학동, 도봉동, 쌍문동...
이사라 하면 보통 집을 옮기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빠 엄마는 두 아이를 데리고 방을 전전했다. 1970~80년대에는 한 지붕 세 가족 형태가 매우 흔한 주거형태였던 듯 싶다. 아마 서울로 서울로 일자리를 찾아 사람들이 올라오던 시절에다 전쟁 이후 가옥이 많이 파괴된 후 아파트는 아직 건설되기 이전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연신내 살 때였다고 한다. 연신내 연신내 하셔서 ‘영수네, 철수네 같은 누구네 집인 줄 알았다. 지명인 줄은 나중에야 알았다. 짧게 살았지만 길게 기억되는 곳이라 아빠 엄마 대화에 많이 올랐나 보다.
어렴풋한 내 어린 기억으로는, 앞으로 맑은 개천이 흐르고 뒤에는 사시사철 놀러 다닐 산이 있는 천혜의 아이들 놀이터였다. 잘 때, 밥 먹을 때 빼고는 늘 집 앞에서 놀았다. 방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평화로웠다. 방 한 칸이지만 아이들은 어리고 새댁은 아직 삶에 찌들지 않아 매일이 재미진 가족이었다. 어느 날 아빠가 퇴근하고 집에 오니 언니와 또래 집주인 아들과 파란 대문 앞에서 진지하게 실랑이를 하더란다.
“아니야! 이거 우리 대문이야” 대문 손잡이를 잡고 언니가 소리쳤다.
“웃기네, 이건 우리 대문이다” 주인집 아이가 간절히 손잡이를 잡고 있는 언니 손을 낚아채 떨어뜨리며 쏘아붙였다.
집 멀리서도 억울한 언니의 외침이 아빠에게 들렸단다.
주인집 아이에게 손을 낚여 채 잡을 것이 없어진 언니 손이 언니 허리춤에서 민망해했다. 괘씸한 집주인 아들을 자기 딴에 있는 대로 매섭게 노려본다. 그러는 동시에 언니는 손잡이를 다시 잡으려 호시탐탐 대문 손잡이도 흘겨봤다. 언니의 눈만 보고 있는 주인집 아이가 언니가 대문 손잡이 잡을 기회만 노리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주인집 아이는 번뜩 생각난 듯 얼른 대문 손잡이에 빈 곳이 없도록 두 손으로 겹쳐 잡는다. 누가 보면 대문 손잡이라도 뽑을 기세다. 이제 대문 손잡이엔 도무지 언니 손가락 한쪽도 들어갈 틈이 없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더 이상 언니의 갈 곳 없는 손이 문제가 아니었다. 눈물이 문제다.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지 않게 더 눈에 힘을 주어야 한다. 씩씩 숨을 몰아쉬며 더 힘을 내야 한다. 우리가 매일 백번이고 천 번이고 아침저녁으로 드나드는 이 파란 대문이 왜 우리 것이 아니라는 거냐. 어째서 지네 문이라는 거냐. 근데 왜 나는 지금 눈물이 나는 거냐 너는 왜 벌써 웃는 게냐...
두 손 가득 대문 손잡이를 쥐어 잡은 주인집 아이는 의기양양했다. 뜻한 바를 이루어 얼굴 가득 웃음이 빙글빙글 돌았다. 소리 내지 않아도 그 만족한 웃음소리가 언니 뇌에 꽂혔다. 두 아이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멀리서 걸어오던 아빠의 머리에는 보이지 않는 모든 상황까지 다 보였다. 아빠가 아이들의 천상 놀이터 연신내 개천 앞 그 파란 대문 앞에 섰다. 우리 집 앞에 섰다. 문고리와 주인집 아이를 번갈아가며 노려보던 언니가 이내 아빠를 옳타구나 올려다본다.
“아빠 이거 우리 문 맞지?” 언니가 아빠를 발견하고 이때다 싶어 묻는다.
“그럼, 우리 문이지” 빨리 이 상황을 끝내고 언니를 데리고 들어갈 요량으로 아빠가 급히 대답한다. 그냥 그 정도로 상황이 마무리되면 좋으련만 언니는 한술 더 뜬다.
“거봐라, 이거 우리 문이지!” 눈물은 쏙 들어가서 혀는 쏙 내밀며 의기양양해서 언니가 주인집 아이에게 쏘아붙인다.
문고리를 쥐어 잡은 주인집 아이의 손가락이 하나둘 힘없이 풀린다. 눈도 같이 맥없이 풀린다. 아이가 눈을 끔뻑끔뻑하더니 왜앵~하며 울며 집안으로 뛰어들어간다.
그날 저녁 식사 중, 주인집 아저씨 아줌마가 단칸방 우리 방으로 말 좀 하자고 찾아왔단다. 말을 하자는 건지 싸움을 하자는 건지 장성한 아들들까지 동원해서. 그냥 머슥히 웃으며 얘들 싸움에 그냥 한 빈말이라고 할 수는 없었을까? 아빠의 젊디 젊은 자존심에다 두 딸과 어린 부인이 있는 곳에서 그렇게 슬렁슬렁 좋은 게 좋은 거지 않습니까로 마무리되지 못했나 보다.
아니, 내가 내 돈 내고 이 집에 사는데 대문도 반은 우리 것이지 않냐고, 뭐 그리 틀린 말이라고 이렇게 다 몰려왔냐며 고분고분하지 않고 당당히 말했다. 아마도 주인집에서 몰려오면 이렇게 대답해야지 하고 미리 생각해 놓았을 수도 있다. 방을 세 주려면 이제라도 문 하나 더 만드쇼, 대문도 하나밖에 없는 집, 무슨 남의 돈을 받고 내어주냐며 적반하장 격 논리로 조막만 한 가장의 품위를 지켰다.
아빠에게 대문은 단순히 물리적 대문이 아니었다. 아빠에게 집이라는 것은 공간이 아니라 가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대문의 소유권이 아니라 가정을 지키느냐 못지 키느냐의 관념이었으리라.
아빠는 삼성동 이층 집에 이사오며 기존 대문 색을 벗기고 초록색으로 덧 칠했다.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혼자서 몇 날에 걸쳐 한 땀 한 땀 칠을 했다. 우리 네 가족에게는 갑자기 너무 커진 집이었다. 아마 집 계약을 하며 이미 계산에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예정대로 이층은 세를 놓았다. 아빠는 이층 발코니에 나선형 철제 계단을 놓아 밖으로 연결되게 했다. 우리 집을 통하지 않아도 세입자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옆 골목 쪽 담을 헐어 작은 출입문을 따로 냈다.
새로 낸 문을 초록색으로 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