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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은 Jul 21. 2021

민방위 훈련

 빠다코코넛 아이스크림


사이렌이 울린다. 에엥~  


매달 15일은 민방위 훈련의 날이다. 수업하다 말고 신이 나서 가방을 싼다. 한 달 전부터 기다려 오던 민방위 훈련이다. 민방위 훈련날이 어떤 수업시간인지 한 달 전부터 미리 봐 둘 정도니 얼마나 기다렸던 시간인가.


소지품을 세세히 다 챙길 필요는 없다. 아무도 그런 치밀함을 원하지 않는다. 책상 위만 정리하면 된다. 우린 군인도 아니고 민방위도 아니다. 게다가 진짜 전쟁도 아니다. 그냥 훈련이다. 노는 시간이란 말이다.


책상 위를 치우고 걸상 네 다리를 하늘 보게 거꾸로 올리고, 몸을 그 책상 아래로 욱여넣는다. 책상 아래 몸통과 사지가 다 들어가려면, 먼저 엉덩이를 교실 나무 바닥에 밀착한다. 배와 가슴이 허벅지와 평행선을 그으며 포개지고, 고개를 숙여 이마를 무릎에 댄다.



두 손을 뒤로 깍지 끼고 뒤통수를 잡아 무릎 쪽으로 당긴다. 물론 이건 훈련 매뉴얼 자세이고, 사실 선생님이 서서 내려다볼 때 허연 얼굴이 아니라 까만 뒤통수나 머리꼭지만 제대로 보이면 된다.  


지루했던 수업 사이 앙꼬 같은 놀이 시간이다. 책상 위에서 민방위 훈련이 한창일 때, 책상 아래에서는 아이들끼리만의 의례가 있다. 줄 없는 민자 종이에 (공책 맨 뒷장 빠빳한 이면지가 좋다) 1~100까지, 여건이 허락한다면 200까지 자잘하게 숫자를 쓴다. 조용히 혼자 민방위 훈련에 임하는 모습일 수 있어 추천한다.


민방위 훈련의 끝나면 쉬는 시간에 머리를 맞대고 모여 숫자 찾기하기 위함이다. 알차게 놀려면 모두 쉴 때, 좋다고 같이 쉬면 안 된다. 놀 수 있을 때를 위한 만반의 놀 준비가 미리미리 필요하다.


옆 짝꿍이랑 마음이 잘 맞는다면 연필심 씨름을 할 수도 있다. 하이 샤파 기차모양 연필 깎기로 곱게 깎은 연필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 심지가 굵은 놈들이 제격이다. 준비성이 철저한 야심 찬 아이만 이길 수 있는 게임이다.

튼튼한 연필을 끊임없이 제공받아야 하니 부모의 경제력도 기반이 되어야 한다. 연필이 빨리 닳아서, 나중에 엄마에게 혼이 나거나 칭찬을 들을 수 있으므로, 각자의 엄마의 성질을 잘 파악해야 한다.  


머리카락 싸움을 할 수도 있다. 머리카락 정수리에서 하나 툭 뽑아 짝꿍 눈앞에 들이대면 뭘 하자는 건지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안다. 초코파이 캐치프레이즈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80년대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았다. 척하면 척이다. 말하지 않고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찰나의 눈빛 하나면 다 안다.


누구 머리카락이 더 억센가 머리카락 싸움도 지치면, 무언의 묵찌빠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머리카락 대신에 손목을 짝꿍 눈앞에 대고 흔들면 된다. 그런데 이건 좀 위험하다. 묵찌빠는 매우 쉬운 국민 놀이다. 하지만 이걸 소리 내기 않고 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푸시식, 으흐흑, 억, 아악, 크크큭… 온갖 요란한 신음소리가 동반된다. 혼나기 십상이다. 하지만 선생님도 민방위 훈련 시간에는 좀처럼 우릴 혼내지 않으신다.

선생님도 아신다. 우리는 민방위가 아니란 걸.


곧 사이렌 소리가 멈추고 ‘공습경보 공습경보’ 마이크가 외친다.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은 공습이 시작된다.


‘국민 여러분 국민 여러분, 실제 상황입니다’


괴뢰군의 침공을 한다. 물론 다 짜여진 판이다. 마이크에서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만담을 시작한다. 스포츠 중계 같기도 하다.

항상 시나리오는 비슷하다. 적이 침공을 했고 대한민국 화력과 군사력으로 북한 괴뢰군에 대처하는 스토리다.


80년대 초 매달 15일엔 이렇게 온 국민이 민방위 훈련을 했다. 길을 가다가도 사이렌이 울리면 어느 건물 처마 밑에라도 파고 들어가야 했다. 모든 차량 운행도 멈춰야 했다. 행여, 누군가 급해서 걸어 다니기라도 하면, 어디선가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노란 완장찬 사람들에게 바로 제지를 당했다.

80년대 초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이렌 소리와 호루라기 소리, 국방색을 띤 모든 것에 순종했다.


야간 등화관제를 기억한다.  한밤에 일제히 소등을 한다. 민방위 아저씨들이 돌아다니며 불 끄라고 단속을 했다. 집에 전기란 전기는 모두 끄고 한방에 모인다. 플래시 라이트 하나를 안고 온 가족이 둥그렇게 머리를 맞대고 불빛이 새 나가지 않도록 이불을 뒤집어쓴다.


그땐 조용히 하라 그러면 그렇게 웃음이 삐져나왔다. 눈만 마주쳐도 웃음이 나왔다. 말하지 말라고 하면, 말은 안 할 수 있었지만 도통 그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사실 소등을 하라고 했지 웃지 말라고 한 게 아닌데 엄마는 그렇게 조용히 하라고 단속을 한다. 등화관제 훈련인데… 웃지 않기 훈련이 되어버린다.

웃는다고, 시끄럽다고 딱 혼날 때 즈음 아빠가 들어오신다. 아빠는 민방위다. 민방위니까 아빠가 우리를 지키려고 온다. 총도 아니고 무기도 아니고, 투게더 아이스크림과 빠다코코넛을 사들고 우리를 지키려고 온다.


80년대 민방위 훈련은 빠다코코넛 아이스크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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