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엄마의 시선에서는 그러하다. 엄마가 얼핏 본 만화가게는 쾨쾨하고, 침침하고, 꾀죄죄하다. 엄마는 마치 거기에 발을 담으면 금세 무겁고, 침울하고 그 축축함이 온몸에 배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얼핏 봐서 그렇다. 제대로 안 봐서 그렇다.
엄마는 만화가게를 말도 못 하게 싫어한다. 엄마가 만화가게에 대해 말도 못 하게 해서 엄마는 만화를 모른다.
만화가게에 대해 말도 못 하게 해 놓고 말도 못 하게 싫어하는 것은 부당하다.
만화의 ‘만’자도 모르면, 싫어하는지 좋아할는지도 몰라야지 않은가. 무턱대고 싫어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엄마가 피아노나 미술, 웅변, 수영등 새로운 것을 나에게 들이밀 때나의 첫 반응은 ‘하기 싫다’이다. 그러면 엄마는 늘, 안 해보고 어떻게 아느냐며 나를 다그친다. 그래서 종내엔 어떻게든 나로 하여금 하게 만든다. 하지만 나는 엄마에게 만화가게에 가자고 할 수는 없다. 그 정도 눈치는 있다. 엄마가 틀렸다는 것을 나는 안다. 엄마는 모른다.
내가 맞건, 엄마가 옳건 그르건 나는 만화가게에 갈 수 없다.
갈 수 없지만 나는 간다. 내 힘으로 풀 수 없는 이런 큰 문제는 내 방법대로 그냥 작게 한다. 내가 나쁜 아이가 아닐까? 마음에 걸리지만 그냥 한다. 잠깐 미안하고 조금 죄책감을 느낀 채로 그냥 한다. 언젠가 엄마가 나를 이해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엄마가 만화를 알게 된다면.
모범생 언니는 모든 것이 나와 다르다. 언니는 엄마가 하지 말라는 것을 대부분 하지 않는다.
‘만화’라고 세로로 쓰인 미닫이 문을 열었다. 무거 워보이는 불투명 유리 미닫이 문이, 동그란 커튼 고리에 걸긴 커튼이 졋혀지듯 촤르르 경쾌하게 열린다.
내 살던 삼성동 골목 만화가게는 반지하에 있다. 가게 이름도 간판도 따로 없다. 그냥 ‘만화’라고만 쓰여있었다. 간판이 없어도, 광고를 따로 안 해도 삼성동 아이들은 모두 그 만화가게를 안다. 미닫이 문을 열고 서너 발자국 계단을 내려가면 바퀴 달린 미닫이 책장들이 오른쪽 왼쪽으로 왔다 갔다 한다.
만화가게 아저씨는 뉘집 아들인지 정말 똑똑하다. 이렇게 많은 책들의 위치를 기가 막히게 다 꿰고 있다. 새로 들어온 신간과 이제 곧 들어올 책이 언제 오는지도 미리 알고 있다.
만화가게 아저씨는 그 당시 나름 마케팅도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하려고 시계는 그 공간에 들이지 않았으며, 문에는 날이 새는지, 내 아이가 있는지 안팎으로 보이지 않게 꼼꼼하게 필름지와 신간 포스터를 붙여 놓았으며 이현세, 신일숙, 김동화, 정영숙 등 유명 작가들을 전진 배치했다. 열 권 빌리면 한 권을 끼워주었고, 친구를 데려오면 한 권을 무료로 빌려주었다. 코 뭍은 동전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도록 쫄쫄이나 쥐포, 캐러멜을 눈에 띄게 진열해 놓았다.
만화가게 아저씨는 정말 똑똑하다. 그렇지, 이 많은 만화를 다 읽었으니 똑똑할 수밖에.
진열은 작가별로 명확하게 분류해 놓았다. 예를 들어 나는 황미나 만화가의 ‘굿바이 미스터 블랙’으로 만화가게에 입문했는데 마지막에 미스터 블랙이 스와니에게 굿바이를 하는지 아니면 매일 굿모닝을 하며 같이 살지 확인할 때가 되면 책장 옆에 황미나 작가의 다른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길 위에 작은 새를 보았다, 이오니아의 푸른 별, 불새의 늪… 폭발한 내 어린 감성이 만화 속 배경인 중세와 신화 속, 유럽과 호주와 미국을 하루에도 수십 번 오갔다. 아르미안의 네딸들 옆에 베르사이유의 장미, 올훼스의 창을 든 영어 선생님…
그때는 이름도 모르던 세분화된 감정들을, 주인공에 빙의해 다 느껴봤다.
그날도 풀방구리에 쥐방울 드나들듯 만화가게에 들렀다. 쥐도 새도 모르게. 스르르 문이 열렸다가 스르르 턱 닫힌다. 썩 들어오지 않고 무얼 하는 게냐고 그날 따라 문이 나를 잡아끌었다. 만화가게 문을 열면 호로록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이상한 나라의 폴처럼. 누가 나를 그렇게 와락 잡아끌면 화가 날 텐데 아, 이 냄새, 책 냄새.. 책이 많아야 나는 냄새. 짚단에서 맡았던 것 같기도 하고 할머니에 다락에서 맡아봤던 이 냄새. 엄마가 쾨쾨하다고 하는 이 냄새가 나에게는 쾨쾨하지 않다. 책책한 냄새다.
책이 많아야 나는 냄새, 책책한 냄새.
지이잉~ 소리가 나는 십 일 자 형광등 밑에 익숙한 정수리가 보인다. 뉘 집 가르마인지 참 인정머리 없게도 갈랐다. 유난히 허연 가르마에 잔머리가 하나 없다. 머릿속이 저렇게 하얗구나, 나도 저럴까? 생각을 한다. 참 집중도 잘한다. 역시 우등생이다. 사람이 들어왔는데 미동도 없다. 아는 사람을 만났는데 인사를 안 하면 엄마에게 혼날 텐데. 엄마한테 혼날 짓을 두 개나 하고 있네, 우등생 언니가.
싸우지도 않았는데 벌써 내가 이겼다. 왠지 엄마한테도 이긴 것 같다.
“언니!” 빙글빙글 웃으며 언니에게 다가간다. 내 시선은 이제 언니 정수리가 아닌 언니 뒤통수와 그 아래 있는 황미나의 야누스 데이에 가 있다.
언니의 책장을 넘기던 손은 멈추고,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눈만 추켜올린다.
‘훗, 안 놀란 척하기는’. 나도 모르게 짝발을 딛고, 어깨 한쪽이 내려가며 덜렁거린다. 내 동공은 내 눈 안에서 한껏 멀어질 듯 동동 떠서 언니가 봐주기를 기다린다. 입은 소리만 안 내었지 제일 열심히 비웃으며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아 만화가게 오기 딱 좋은 날이네.
부엌에서 까만 봉다리를 가져오는 것은 쉽다. 집 안에서 빈 봉다리를 들고 다니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의례 내가 또 무슨 엉뚱한 장난을 시도하는 거겠지 한다.
하지만 집 밖에서 봉다리를 들고 집에 들어오려면 검열을 거쳐야 한다. 80년대에는 도어락이나 자동문이 없었다. 대문 밖에서 초인종을 누르면 집안에서 인터폰으로 누구인지 목소리를 확인한 후에 열어주는 시스템이다. 엄마 눈에 띄지 않고 만화책을 내방으로 가지고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빈 봉다리만 들고 2층으로 간다. 언니에게 봉다리를 전달하고 나는 집을 빠져나온다. 엄마 잠깐 다녀올게요. 언니는 방에서 봉다리를 노끈을 묶는다. 노끈이 풀리지 않도록 묶는 것은 걸스카우트에서 가르쳐 준다. 다 배운 대로 하면 된다. 역시 수업시간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나는 만화가게에서 만화를 빌린다. 빌리고 갚고, 연체되면 이자가 붙는다. 이것은 경제다. 언니가 가서 보는 50원과 내가 가서 보는 50원을 합하면 딱 빌려보는 금액이 된다. 산수다. 만화를 빌리고 언제 반납해야 하는지 확인한다. 스케줄 관리, 자기 관리다. 언니가 기다리고 있다가 2층 베란다에서 노끈으로 묶은 검은 봉다리를 내린다. 검은 봉다리가 내 가슴팍에 닿으면 만화를 봉다리에 담는다. 노동의 분담이다. 이때 정확한 노끈의 길이와, 만화책의 무게를 견딜 봉다리의 견고함이 중요하다. 추정과 가설검정의 단계이다.
언니가 이층 베란다에서 검정 봉다리에 든 만화책을 끌어올리고 나는 집으로 유유히 들어간다.
“엄마 다녀왔어요” 과장되게 빈 손을 보여주며 말한다.
“어디 갔다 왔니?” 엄마가 묻는다.
“엄마, 내가 지은이 뭐 좀 사 오라고 시켰어” 언니가 2층에서 뛰어 내려오며 나를 내 팔을 왈칵 잡아 메달리듯 잡는다. 우애 좋은 자매 모습에 엄마다 흐믓하다.
완벽한 협력이다. 2층으로 올라가 가져온 만화를 어떻게 나눠, 누가 먼저 무엇을 볼 것인지 정한다. 분배다. 이를 위해서 충분한 이야기를 한다. 누가 왜 이것을 먼저 볼 자격이 있는지 설득을 해야 한다. 토론이다. 각자의 방에 흩어져 만화를 본다. 노동의 기쁨이다. 제 자리에서 각자의 본분을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주권을 가지며 그로 인해 모두 행복하다. 민주적인 80년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