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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은 Jul 1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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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를 기억한다


 80년대 초 강남의 여름은 더워도 더워도 어디 찬바람 한줄기 흘러나오는 데가 없었다. 그 시끄럽게 울던 매미도 더워 지칠 때 즈음되서야 우리는 대문 문 턱에 앉아 쉴까. 더워도 놀고, 추워도 놀고, 쪄 죽어도 밖에서 죽을 기세로 뛰 놀았다.


 그 더운 여름방학이 끝나가는 8월 중순부터 마음이 매우 급하다. 밀린 일기와 탐구생활, 방학 동안 즐거웠던 장면을 그린 미술 몇 점, 독후감 몇 개와 과학 실험 등 밀린 숙제를 해야 한다.


1학기 방학식 날 받았던, 아직 책가방에 고스란히 있는 2학기 교과서도 예쁜 포장지로 싸고 그 위에 비닐도 한 번 더 싸야 한다. 분명 똑같은 포장지로 하는데 차분한 우리 언니는 책 포장마저 나보다 더 잘한다. 참 이해가 안 된다. 장비도 재료도 다 같은데...

내가 그렇게 엉성하게 하고 있으면 먼저 야무지게 끝낸 언니가 답답해하며 해주겠다고 나선다. 안된다. 내가 한다. 내 손으로 하는 게 언니한테 대적하는 나의 방법이다. 언니는 삐뚤어진 것을 못 견딘다. 매우 힘들어한다. 그래서 내 것은 내가 한다. 내가 끝까지 다 한다.


 이거 봐, 이래도 되잖아. 일부러 더 대충 싸고는 잘 붙으라고 엉덩이로 깔고 앉아 빙글 의자 삼아 돌며 빙글빙글 웃는다. 그러면 꼼꼼히 싼 언니 교과서랑 모냥새가 얼추 비슷해진다. 언니는 저만치서 나를 보는 게 아니라 엉덩이 두 쪽 그 아래 교과서들을 보고 혼자 힘들어한다. 언니는 잠결이라도 비뚤어진 커튼을 바로 고쳐놔야 잠이 드는 사람이다.

 모범생 언니가 힘들어하는 숙제가 하나 있다. 방학 일기이다. 다른 숙제는 일찌감치 끝내 놓는 데에 비해 일기는 우선순위에서 좀 밀리나 보다. 늘 개학을 앞두고 마지막에 허둥댄다. 나는 재미있는 일기를 먼저 쓰고 다른 숙제를 제일 마지막에 몰아서 한다. 매 방학 끄트머리서 언니가 내 일기를 탐한다. 내 일기를 보고 자기 것을 교묘하게 각색한다.


 그렇게까지 해서 올해도 종합 우등상을 받아야 하느냔 말이다. 상고머리 주제에! 난 내 일기장을 잘 숨겨놓는다. 내 방도 아니고 엄한데 숨긴다. 화분 밑이라든가 tv뒤 라든가. 물이 좀 묻고 먼지가 붙어도 상관없다. 언니 손에만 안 들어가면. 하지만 적은 늘 내부에 있다. 엄마까지 동원해서 기어코 찾아낸다.

그렇게 개학을 하면 이번 방학 숙제 최우등상도 또 언니 몫이다. 나도 뭐 언니의 2년 전 탐구생활을 좀 참고해서 내 것을 마무리하고, 표 나는 과학 실험 결과물을 하나 정도 큼직하게 만들면 우등상 정도는 받을 수 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밑지는 장사다.

 들고 가기도 힘든 과학 실험 결과물과 그 많은 방학 숙제를 다 한 대가는 가느다란 금장 줄 둘린 종이 한 장이다. 성적표에 기록조차 안 된다. 들이는 노력에 비해 결과가 형편없다. 가성비 제로다. 똑똑한 언니가 그건 모른다. 융통성 제로다.


 언니보다 엄마가 더 신나서 지인들에게 전화 몇 통을 하고, 반달눈을 하고 언니 얼굴을 몇 번 들여다보거나, 짧은 머리를 두어 번 쓸어주는 정도다. 그런 건 심부름 한번 제대로 해도 얻을 수 있다.  

 단, 명심해야 하는 것은, 엄마가 나에게 다음번엔 너도 잘해라~ 하실 때 눈을 최대한 크게, 똑바로 뜨고, 아주 명쾌하게 진정성 있게, 네! 하며 고개를 크게 천천히 한번 까아-딱 하면 된다. 네에~ 하고 끝을 내리거나 질질 끄는 식은 곤란하다. 내심 미안해도 안 된다. 미안할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오랜만에 언니를 삼성동에서 만났다. 지금도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사는 우리 언니, 한참 갱년기로 붉으락 푸르락 하더니 목 선풍기를 달고 귀 옆머리를 휘날리며 저기서 나타난다. 목 선풍기라니. 아, 그냥 나갈까?


오래간만에 삼성동에서 만났으니 자연스럽게 옛날 얘기를 하게 된다. 지은아 난 어릴 때 너한테 뭐 하나 부러운 게 없었는데 딱 하나 있었다. 하하. 난 그렇게 오랫동안 언니의 모든 게 다 부러웠는데 언니는 달랑 하나란다. 들어나 보자.

뭔데, 뭐가 부러웠는데? 언니보다 키 큰 거? 언니보다 인기 많았던 거? 언니보다 예쁜 거? (지금은 내가 더 낫다) 내 맞는 말에 언니가 더 더워져서는 목 선풍기를 가슴 안쪽으로 고쳐 두른다.

"뭐가 부럽다는 건데? 내가 재차 묻는다.


"너 글 쓰는 거. 너 글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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