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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은 Aug 11. 2021

장충동 바닥

벽성의 상경기


벽성은 철이 없다.


어려서가 아니다. 무엇이든 몸으로 직접 체험해야 몸에, 머리에, 가슴에 쌓인다.

저 웅덩이를 넘을 수 있을까? 생각을 하기 전에 이미 웅덩이 위에 몸이 먼저 떠 있다.  발이 흙탕물에 닿으면 ‘아, 이 웅덩이는 좀 크구나’이고, 운 좋게 웅덩이 반대쪽에 발을 디디면 ‘어라 요건 좀 만만하네’한다.


아니면 호기심이 많은 아이일 수도 있다. 당장 처한 상황보다 앞으로 있을 변화에 더 흥미를 느낀다.

앞당겨 걱정을 하는 적이 없다. 일이 벌어진 후에야 후회하든, 기뻐하든, 원망한다. 기어코 바닥을 쳐봐야 이게 바닥이구나, 한다.


한국전쟁이 끝난지 몇 년 후, 벽성은 대구 방적 공장 근처 국민학교에서 6.25 피난길에 헤어진 제 아바이를 다시 만났다.

벽성 어마이는 어린 벽성일 위해 벽성 아바이가 제발 살아만 있기를 기도했다. 신앙심이 깊은 벽성 어마이 원을 하나님은 철떡 같이 들어주셨다. 고마우신 하나님! 과연 이갑 씨는 잘 살아 있으되, 혼자가 아니었다.


벽성 아바이 이갑 씨는 그 전쟁통에 벽성과 할마이와 어마이가 살아 있을 턱이 없다 단정하고 서울에 새 살림을 냈다. 둘째 부인은 김일성대학 후배 송양선 씨다. 벽성이 대구에서 돼지국밥 먹고 무럭무럭 자랄 때 서울에선 벽성의 배다른 동생 셋이 숨풍 숨풍 태어났다.


6.25 전쟁으로 제대로 된 길이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되었던 서울이다. 땅을 메꾸고, 길을 포장하고, 길을 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북에서 남에서 전국 각지에서 먹을 것과 일거리를  찾아 서울로 모여든 피난민들과 실향민들도 신분을 메꾸고 과거를 지우고 정체와 이념을 포장하기에 정신없었다. 힘 합쳐 일제의 잔재를 걷어내고, 빨갱이 허물을 벗고, 농촌 어촌 시골뜨기 모습을 없애고 모두들 서울내기들로 거듭났다.

이갑 씨의 본적은 더 이상 이북이 아니다. 이갑 씨의 본적은 피난 내려와 처음 주소지를 팠던 종로구 관철동 266번지이다.


할마이와 어마이는 자는 벽성을 내려다보며 오래오래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한다기보다는 한마디를 하고 울고, 두 마디를 하고 울었으니 그냥 고부가 마주 앉아 밤새 운 것이다. 소매 끝이, 옷고름이, 앞섬이 다 젖는지 모르고 밤을 지샜다.

아무리 오래 얘기를 하고 울어도 답은 하나였다. 벽성을 서울 제 아바이에게 보내는 것이다.


돼지국밥집에서 벌이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어마이 혼자 키우는 것보다 번듯한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자라는 것이 벽성에게 가장 좋은 환경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아무리 전쟁 직후라 아바이 없는 아이들이 천지라 해도 조금만 눈에 거슬리면 후레자식이란 말을 스스럼없이 날리던 시대다. 게다가 서울이다. 벽성이 서울에서 공부를 마치고 난 후 나중에 만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벽성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돼지국밥집도 문을 닫았다. 닫힌 국밥집 쪽문 안쪽에서 돼지국밥 대신 물을 끓였다. 벽성을 다 벗기고 뜨거운 물 한 양동이에 찬물 두어 바가지 섞어 벽성을 씻기기 시작했다. “새 어마이 말 잘 들어라. 서울 가믄 동생들이 서이 있단다. 동생들도 니가 챙기고 언니 노릇 잘해라(이북에선 손위 형제를 언니라고 부른다) 그라도 할마이가 함께 갈 거이니 나는 니 걱정 안 한다. 여기보다 거기서 니가 잘 될 것이다. 무조건 공부를 잘해라. 잘 하믄 내가 니를 보러 갈것이메”


벽성은 어마이가 왜 우는지를 몰랐다. 서울이 그렇게 좋은 곳이고, 공부를 잘하고 있으면 어마이는 볼 것인데 왜 그렇게 우는지 잘 몰랐다. 그저 어마이가 우느라고 정신이 없어 그런지 물이 너무 뜨겁고, 너무 박박 문대서 아플 뿐이었다. 온몸이 벌겋게 되도록 벽성도 닦이고 자기 눈물도 닦고… 한나절을 그렇게 눈물인지 목욕물인지 모를 깊은 물 안에 잠겨 있었다.


젊은 새댁 송양선 씨는 서울 장충동 주택가에서 고만고만한 남자아이 셋을 단도리하며 마당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전쟁 전 다니던 김일성대학이야 이북에서나 알아주지, 남한에서는 말도 못 꺼내고 집 안에 들어 앉아 내리 아들 셋을 나았다. 대구까지 가서 결국 큰 아들 벽성을 데리고 대문을 들어선 이갑 씨에게 송양선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매를 더욱 단단히 조이고 쪼그려 앉아 빨랫감을 노려보며 보란 듯이 거친 숨만 쉬었다. 송양선씨는 벽성을 흘끗 한번 빠르게 훌터 볼뿐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이갑 씨는 벽성을 마당에 두고 물 한 잔도 안 마시고 나가버렸다. 벽성은 장충동 어느 골목집 마당에서 나가지도, 방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서 있는 게 할 일이었다. 송양선 씨가 빨래를 다 하고 빨랫줄에 빨래를 널 때까지도 벽성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만일 벽성이 그 첫 만남에서 빨래 너는 것을 거들었다면 벽성의 인생이 좀 달라졌을까? 혹시, 어마이가 단도리 했던 것처럼 마당에 널브러져 노는 배다른 어린 동생들에게 아는 채라도 먼저 했더라면 벽성의 처지가 좀 나았을까?


어린 벽성은 두 여자가 그 난리 통에 목숨 걸고 지켜냈던 끔찍한 장손이었다. 어제 까지만 해도 두 여자가 온종일 배를 곯아 벽성의 한 끼를 챙겼다. 벽성을 금이야 옥이야 했다. 벽성은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벽성은 장충동 주택가 어느 마당 바닥만 보고 있었다. 벽성은 바닥에 떨어지는 자기 눈물을 보았다.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야 지금 내가 슬프구나 했다. 눈물이 왜 나는지는 몰랐지만, 어제 왜 어마이가 밤새 울었는지는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벽성의 바닥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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