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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사랑 Sep 04. 2023

드라마 쓰는 러너입니다. (06)

이런 러닝 해보셨어요? 1. 운동화세탁런 혹은 인생세탁런

회원들의 적극적인 주도와 참여를 장려하는 우리 방에서는 가입 이후 3회 이상 러닝벙에 참여했을 시 본인도 자유롭게 러닝벙을 개설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긴다. 채팅방에 러닝벙 공지를 올릴 때 꼭 입력해야 할 핵심적 정보로는 ‘장소’, ‘시간’, ‘목표 거리 및 페이스’ 정도가 있는데, 한 가지 더, 꼭 입력해야 하면서 핵심적인 정보는 아니라 정해진 양식이 없는 게 있으니 바로 ‘번개 공지 제목’이다. 


대개는 오늘의 러닝벙이 어디서 열리는지, 그리고 어떤 성격의 러닝인지를 짧게 설명하는 느낌으로 ‘반종(반포종합운동장)런’ 혹은 ‘한강 잠수교 5k런’ 이렇게 정보요약형 제목이 올라오는데 이따금 드립에 욕심 있는 몇몇 재치 있는 회원들 덕분에 듣도 보도 못한 기발한 제목이 올라왔다가 뜻이 직관적이고 입에도 착 붙어 방 공식 러닝명으로 그대로 굳혀지기도 한다. 예를 들면 평균보다 조금 느린 페이스의 러닝을 일컬을 때 종종 쓰곤 하는 <거북런>, 폭식한 자들의 죄책감을 자극해 동기부여를 유도하는 <속죄런>, 조교 본성이 있는 러너가 다소 의지가 박약한(=필자 같은) 러너를 어떻게든 얼르고 달래고 겁박(?)해가며 더 뛸 수 있게 도와주는 <멱살런> 등등. 그중에서 내가 가장 참신하고 재치 있다고 생각했던 러닝명은 바로- 오늘의 부제목에서 쓰인 <운동화세탁런>이다. 


<운동화세탁런>은 여름이 시작되며 창궐(?)한 런명인데 최근 이상기후로 인해 비 예보 정확도가 워낙 떨어지니 예기치 않게 오락가락하는 비를 맞으며 뛴 러너들이 ‘비 맞으며 시원하게 뛴 김에 운동화도 빨고! 1석 2조의 운동화세탁런!’ 이런 식으로 정신승리를 일삼을 때 썼다가, 최근엔 아예 시원한 우중런에 중독된 사람들이 ‘운동화세탁런 하러 나가자!’는 식으로 광기 어린 권유를 할 때 쓰는 말로 자리 잡았다.


<운동화세탁런>의 유사품으로 <인생세탁런>도 있는데 그게 뭐냐면, 바로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알게 된다.






며칠 동안 계속해서 비가 오락가락하던 7월 중순의 어느 날. 실내 트레드밀 러닝, 그리고 혼러닝을 너무도 싫어하는 나는 악천후 때문에 며칠간 야외에서 크루들과 같이 러닝을 하지 못해 좀이 팍팍 쑤시던 차였다. 그날 하루 종일 내리던 비가 8시 무렵에 갑자기 소강상태를 보였는데, 8시면 사실 뛰기는 딱 좋은 시간대였지만 같이 뛸 사람을 급작스럽게 모으기에는 너무 여유가 없어 보여서 ‘오늘도 텄구나...’ 하고 있던 그때에 용자 ‘빠삐코’님이 쓴 번개 모집 글이 기습적으로 올라왔다.


‘서울 웨이브런 5km, 눈치게임 비 와도 난 모름’


그러니까 일단은 지금 비가 그쳤지만 다시 올지도 모르는데, 알아서 잘 판단해서 뛸 사람이 있으면 빨리 튀어나오라는 그런 느낌의 공지였다. 마침 러닝이 하고 싶어 죽겠던 터에 확인해 보니 예보 상으로는 비가 와봤자 강우량도 얼마 안 되는 듯해서 빠삐코님에게 최대한 빨리 가볼 테니 좀 늦어도 양해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급히 짐을 쌌다.


정신없이 따릉이를 빌려 약속 지점인 서울 한강의 한 카페 앞까지 전속력으로 내달리고 있는데 어라, 비가 다시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닉네임은 눈에 익어도 그때까지 같이 뛴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초면인 빠삐코님과의 약속시간에 늦을까 봐 ‘비가 오기 시작하네? 빗줄기가 제법 굵은데? 어떡하지?’라는 고민을 할 새도 없었다. 무지성으로 계속 계속 페달을 밟아 앞으로만 나아가고 있는데... 빗줄기가 점차로 조금 심각하게 거세지기 시작했다. 


도착을 10여분 정도 앞두고 중간에 교차로 신호를 잠깐 기다리며 휴대폰으로 톡방을 들여다보니 채팅방에서는 그때 즈음 ‘뛰어도 되는 날씨 맞나’, ‘두 분 러닝 하시고 꼭 생존 보고 해 주세요’라며 우리를 걱정하는 글이 슬슬 올라오기 시작했고, 빠삐코님은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없다'며 약속장소에 먼저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빠삐코님을 이 빗속에 한참이나 기다리게 하는 미안함과, 며칠간 러닝을 하지 못한 데 대한 짜증과, 또 뭔지 모를, 정체가 불분명한 오기로 신호가 바뀌자 ‘괜찮을까’라며 스멀스멀 올라오는 염려를 일단 차단하고 반사적으로 자전거 페달을 마구 다시 밟기 시작했다.


도착 5분 전, 이젠 거의 폭우로 변한 빗속을 자전거를 타고 내달리는 날 한강을 산책하는 사람들이 황당한 시선으로 고개까지 돌려가며 쳐다보기 시작했다. ‘저 여자 뭐야? 괜찮나 이 폭우 속에 웬 자전거 라이딩...???’ 시선 속에 이런 걱정과 뜨악스러움이 담겨있는 게 느껴졌다. 심지어 내가 자전거 라이딩뿐 아니라, 곧 5km가 넘는 러닝을 할 계획이었다는 걸 알았다면 그들이 뭐라고 했을까. 미쳤냐고, 머리에 왜 꽃은 안 달고 뛰는 거냐고 했으려나? 


남들이 보기에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이상하게 날 기묘한 해방감에 젖게 했다. 해방감과 더불어 그런 것에 해방감을 느끼는 나 자신에 대한 어이없음으로 기어이 웃음이 삐질삐질 새어 나오기 시작했고, 빠삐코님과의 약속 장소인 카페 앞에 도착할 무렵에는 실성한 사람처럼 너털웃음이 멈춰지질 않았다. 폭우 속에서 미친 듯이 웃으며 자전거를 끌고 다가오는 나를 보더니, 천막 밑에 서있던 빠삐코님도 어이가 없는지 황망한 너털웃음으로 날 맞이했다. 그리고서 건네진 인사말.


‘진짜... 미친 사람 같아요 콩국수님.’


우린 그날 처음 만난 사이였는데, 그 코미디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시추에이션이 우리 사이의 벽을 단번에 와르르 허물었다.






우리는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의지(뛸 수 있겠어요? 어쩌겠어요 여기까지 왔는데)를 확인한 뒤, 찰박찰박 빗물이 튀기는 소리를 들으며 함께 우중러닝을 시작했다. 


나는 그날까지 6k 이상은 뛰어본 적 없는 러닝 3년 경력의 초보 러너였다. 게다가 페이스는 1km당 7분 정도밖에 안 되는 거북이 러너였고, 빠삐코님은 러닝 6개월 미만의 초초초초초보 러너였지만 워낙 어렸을 때부터 수영을 오래 해 온 진성 스포츠인으로 짧은 경력에도 불구, 벌써 5분 초반대 페이스를 가진 열혈 토끼 러너였다. 


토끼 러너 빠삐코님은 그날의 유일한 팀멤버인 거북이 러너를 위해 7분대로 페이스를 맞춰주며 옆에서 자상하게 이런저런 코칭을 해주었다. 사실 평소보다 느리게 뛰면 몸이 마냥 편할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자신이 익숙하다고 느끼는 페이스보다 훨씬 느리게 오랫동안 뛰는 것은 신체적으로 꽤 힘든 일이라는 게 러너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 빠르게 뛸 수는 없는 날 위해 자신이 페이스를 늦춰 나란히 뛰며 빗속에서 내가 그날 PB(Personal Best=개인 최고 기록)를 경신하게 했다. 방법은 좀, 다소 기만적이었지만.


주로 뛰던 익숙한 코스가 아니어서 정확한 거리 가늠이 어려웠던 내게 빠삐코님은 성수대교까지 찍고 돌아오면 대충 5~6k 정도 될 테니 거기까지만 뛰고 오자는 설명으로 선선한 동의를 얻어내더니, 성수대교를 도착할 무렵에는 갑자기 말을 바꾸며 태세 전환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콩: (헉헉) 어디예요? 다 왔나요? (시계를 보고) 벌써 3킬로나 뛰었는데... (헉헉) 

빠: 아, 다 왔는데. 성수대교 지나서 바로 코앞이 토끼굴이거든요? 거기서 사진 찍으면 진짜 이쁘니까 토끼굴까지만 찍고 가세요. 온 김에.

콩: 아니.. (헉헉) 벌써 3킬로를 넘었는데... 돌아가면... (헉헉) 6킬로... 넘을 거 같은데...

빠: 아 진짜 코앞이에요. 금방이야. 


(1분 뒤)


나: 아니.. 코앞이라더니... 아직... (멀었냐고 묻고 싶음)

빠: 진~짜 다 왔네요. 저기다 저기! 보여요? (안 보임)


(1분 뒤)


나: 아니.. 빠삐코님... 이제 거의... 4킬로가... 다 돼간다고!!!! (포악)

빠: 하하. 다 왔어요. 바로 저기잖아. 토끼굴. 


그놈의 토끼굴은 내 눈엔 보이지도 않는데 빠삐코님은 자꾸 ‘다 왔다’ ‘다 왔다’ ‘보인다’ ‘보인다’만 연발하며 계속 해맑게 내 멱살을 질질 잡아끌고 뛰었다. 


나는 이제 거의 토끼한테 이상한 나라로 끌려가는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어김없이 내 안에서 ‘와 미치겠다 도저히 못 뛰겠다 그만두고 싶다’ 외치는 소리가 들끓기 시작했으나, 트랙 운동장이 아니라 혼자 뒤처질 수도 없으니 더 환장할 노릇이었다. 빠삐코님과 맞춰 가지 않으면 우리는 따로 4k를 뛰어서 돌아가야 하는데 내 옆에 흔한 악마 조교 하나 없이 그 먼 길을 갈 엄두는 더더욱 나지가 않아서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계속 앞만 보고 뛰었다.


마침내 4k 지점을 돌파했을 때, 내 눈앞에도 드디어 그놈의 토끼굴이 나타났다. 한강에서 압구정나들목으로 이어지는 지하 진입시설인 토끼굴은 내부 시작지점부터 끝까지 다채로운 그래피티로 빈 틈 없이 도배가 되어있어 들어서자마자 정말로 이세계(異世界)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우리는 비에 쫄딱 젖은 생쥐 꼴을 하고서, 밖에는 여전히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지만, 비가 완전히 차단된, 그리고 세상과도 완전히 차단된 것 같은 그 토끼굴에서, 사이좋게 번갈아 벽화 앞에서 인증샷을 남겼다. 



사진을 찍으며 내 머릿속에 맴돌았던 문구는 언젠가 스치듯이 본 적 있는 짤막한 아포리즘이었다.


‘Life isn’t about waiting for the storms to pass. It’s about learning how to dance in the rain.‘


인생이란 폭풍우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빗속에서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비비안 그린의 말이 이런 날, 이런 방식으로 다시 생각이 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빗속에서 춤을 추는 것도 좋지만, 빗속에서 뛰는 법을 배우는 것도 괜찮네.’ 


빠삐코님과 나는 짧은 휴식을 가진 뒤 토끼굴에서 나와 다시 원점까지 뛰어서 총 8k의 기록을 남긴 채 서로의 안전 귀가를 응원하며 헤어졌고,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다시 같이 러닝을 하지 못한 채 헤어졌다. 빠삐코님이 바빠져 우리 러닝방을 나갔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미친 짓이라고 할 만한 일에 두려움을 극복하고 뛰어들어보는 시도,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 대신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색다르게 즐기려는 노력은 앞으로도 인생에서 많은 순간 꼭 필요할 태도였으므로 나는 꽤 중요한 것을 러닝을 통해 또 하나 깨달은 셈이었는데 그러므로 그날의 러닝은 정말로 단순한 <운동화세탁런>이 아니라 제법 멋진 <인생세탁런>이었다. 


그리고 그날의 미친 짓은 빗속에서 나를 기다려 함께 뛰어준 빠삐코님이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낭만적일 수 없었을 것이었기에... 때때로 비가 오는 날 나는 토끼굴과 빠삐코님을, 그리고 쏟아지던 빗속에서 우리 두 사람이 내던 길 위의 마찰음을 떠올릴 것 같다.







p.s. 집 나간 빠삐코님을 찾습니다. 바쁜 일 끝나면 꼭 다시 돌아와서 인생세탁런 또 같이 뛰어요 ㅠㅠ 기다리고 있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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