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 연작소설_되돌아온이들
1
민하는 학교 앞에서 준호를 기다렸다. 평소 친구들과 걸어나오던 준호가 선생님 손을 붙잡고 나왔다.
"준호 어머님, 안녕하세요. 오늘 준호가 조금 놀란 거 같아서 제가 데리고 나왔어요, 복도에서 넘어져서 우는데 울음소리가 크더라고요. 제가 가봤더니 뭐가 그리 서러운지 아직도 진정이 안 되나봐요."
준호는 민하 품에 꼭 안겼다. 이제야 진정이 되는 모양이다. 민하는 이유를 물었지만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몇 시간 전, 점심시간 준호는 친구들과 급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들은 주말에 엄마, 아빠랑 여기저기 다녀온 이야기를 꺼냈다. 준호는 아빠 있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그게 서러워서 울음이 터졌는데 멈추지 않았다.
"선생님 감사해요, 준호가 담임선생님이 너무 좋대요. 잘 챙겨주셔서, 나중에 식사라도 대접할게요."
"아닙니다, 준호가 잘 따라줘서 저도 아이들 지도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2
세종시 한 아파트, 세미는 온라인으로 주문한 수입 치즈를 꺼내 접시에 담았다. 잠시 뒤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야, 나 왔어. 와인 사오라고 한 거 이거 맞지?"
"오케이 잘했어, 손 씻고 오븐에서 토마토구이 꺼내서 와."
세미 앞에 앉아 와인을 마시는 남자는 세미보다 8살 어리다. 5급 재경직 시험에 합격해 기획재정부에서 근무하다 국세청으로 왔다. 세미는 젊음에 끌리기도 했지만 5급 재경직으로 입사하면 국세청장까지 노려볼 수 있는 그의 미래도 봤다. 둘은 평일 저녁 밀회를 즐겼고 주말에는 각자 가정에 충실했다.
민하는 세미의 불륜 상대방이 누구인지 찾았다. 건혁은 회사에서 자기 아내가 6급 국세청 직원이라고 자랑을 해댔다. 특히 주말부부여서 금슬이 좋다고. 세미는 건혁이 자랑하는 그 아내가 어린 남자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면 어떨까라고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3
세종시 한 대형마트, 민하는 준호와 장을 보고 있었다. 준호가 좋아하는 돈가스를 사러 갔다가 반가운 얼굴을 마주쳤다.
"선생님! 돈가스 사려고요?"
"응, 준호도?"
준호는 선생님이 정말 반가웠다. 민하도 준호 선생님과 반갑게 인사하고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민하는 장을 다 보고 준호와 햄버거를 먹으러 갔다. 준호는 엄마와 마트에서 장을 보고 먹는 불고기버거와 밀크셰이크를 좋아했다. 햄버거를 주문하고 자리를 찾는데 빈자리가 마땅하지 않았다. 한쪽이 비어있는 곳을 바라봤는데 거기 또 준호 선생님이 있었다.
"어머나, 선생님 또 보네요. 햄버거 좋아하세요?"
"아 어머님, 주말에 혼자 뭐 해 먹기도 그렇고 간편해서요. 아 자리가 없군요, 여기 앉으세요."
준호는 햄버거에 집중했고 민하와 선생님은 대화의 꽃을 피웠다. 그러다 민하는 깜짝 놀랐다.
"정말요? 진짜예요? 혜성신문에서 근무했었어요?"
"네, 그럼요. 오래는 아니지만 참기자 되려고 나름 열심히 했었죠."
"진짜 놀랐어요, 여기서 혜성신문에 근무한 사람을 만날 줄이야."
"언제 진짜 밥 한 번 드시죠. 학부모 아닌, 같은 회사 다녔던 사람으로요."
준호의 선생님은 재명이었다.
4
민하는 세미의 불륜 증거를 모았다. 이 사실을 건혁에게 알리고 국세청 감사관실에 신고도 해야 했다. 인터넷 검색으로 흥신소를 찾은 민하는 세미와 그 남자의 불륜 증거 사진을 의뢰했다. 일주일 뒤 흥신소에서 연락이 왔다.
"그 두 사람 불륜이 맞아요? 부부같이 거리낌 없이 행동하던데요."
"그래요? 그럼 사진이 다양하겠네요."
"네 뭐 물고 빨고, 전송해드릴테니 보세요."
민하는 휴대폰으로 사진을 확인했다. 밖에서 포옹하는 사진부터, 아파트 내부에서 스킨십하는 사진까지 다채로웠다. 곧바로 건혁에게 전송하려다 민하는 재명을 떠올렸다. 부끄럽지만 자기 계획을 털어놓고 싶었다. 재명에게 전화를 걸어 그때 먹기로 한 밥을 지금 먹자고 했다.
"선생님 갑자기 불러내서 죄송해요. 제가 이 동네에 믿고 상의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요."
"아니에요, 저를 믿어주시니 감사하죠."
민하는 혜성신문에서 건혁에게 당한 이야기부터, 세미의 불륜까지 그동안 사연을 전부 설명했다. 재명은 감사관실에 신고부터 하고 감찰 진행과정을 본 뒤 건혁에게 사진을 보내자고 했다.
5
가을은 석 달쯤 지나고 어느 정도 회사생활에 적응했다. 건혁은 친절하게 가을이 업무에 적응하도록 도와줬고 다른 팀 직원, 기자들도 가을에게 잘해줬다. 취재부서, 편집부, 경영지원부서 직원까지 혜성신문 전체 회식이 열렸다. 사장은 팀별 직원 한 명씩 탑주를 마시게 했고 마신 사람은 또 누군가를 지목하도록 했다. 가을은 이렇게 소주를 10잔 넘게 마셨다.
건혁은 취기가 올라 달리는 가을에게 맥주도, 소맥도 따라줬다. 2차 호프집에서 직원들만 남아 편하게 술을 마시던 중 가을은 기억을 잃었다. 기회를 엿보던 건혁은 가을을 모텔로 데려갔고 샤워를 하며 콧노래를 불렀다. 이때 갑자기 눈을 뜬 가을은 어리둥절한 채 소지품을 챙겼다. 막 씻고 나온 건혁은 빠르게 가을의 양쪽 손목을 잡고 입을 맞추려고 했다.
을은 건혁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자 다가오는 입술을 깨물어버렸다. 건혁은 입술 살집이 떨어질 정도로 물려, 피를 쏟았다. 가을은 건혁이 고통에 울부짖는 사이 재빨리 모텔을 빠져나갔다. 정신이 번쩍 든 가을은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했다. 이불속에서 가을은 공포에 떨었다.
이튿날, 가을은 부서장에게 아프다고 말하고 경찰서로 갔다. 성추행을 당했다고 눈물을 흘리는 가을을 보고, 민원실 여경이 친절하게 진술을 받아 신고 접수까지 해줬다. 다음날, 가을은 부서장에게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6
민하는 감사관실에 익명으로 사진과 투서를 보냈다. 감사관은 증거가 확실하자 즉각 사진 속 인물이 누구인지 파악하고 조사를 진행했다. 간통죄가 폐지돼 형사 처벌은 어렵지만 공무원 품위유지 의무 위반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세미와 그 남자가 감사관실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이 국세청에 쫙 퍼졌다.
민하는 건혁이 사용하는 회사 메일로 접속해 ‘내게 쓰기’ 기능으로 세미의 불륜 사진을 전송했다. 민하는 재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조사도 끝났고 사진도 보냈어요. 조금 허탈하기도 하네요, 잠깐 만날 수 있어요?"
학교 앞 커피숍에서 만난 두 사람은 건혁을 신고할지, 말지 고민했다. 그 순간 민하에게 전화가 왔다.
"저 진풍이에요. 민하 씨 후임으로 들어온 친구가 건혁을 성범죄로 신고했어요, 성폭행 미수가 적용될 거 같다는데요."
"뭔 짓을 했다는데요?"
"술 취해 기억 잃은 사람을 모텔로 데려가 강제로 하려고 하는데 그 친구가 입술을 깨물고 도망쳤대요."
"다행이네요, 저도 신고할까 말까 고민 중이었어요."
"신고하세요, 여기 먼저 신고가 돼 있으니까 조금 힘드셔도 이쪽에서 신고하는 게 좋을 거 같네요."
재명은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진풍인지 알고 말을 꺼냈다.
"아 진풍 선배인가봐요, 그 선배 말대로 거기에 신고하는 게 낫겠어요."
7
메일함을 확인한 건혁은 세미에게 분노를 느꼈다. 민하나 가을에게 호감을 느끼긴 했지만 사랑한 건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반면, 세미의 행위는 서로 애정이라는 감정을 나누고 자신을 배반한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 사이 경찰은 건혁을 향한 포위망을 좁혀왔다.
민하는 가을이 신고한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경찰은 가을의 사건이 벌어진 곳과 건혁이 민하를 강간한 곳이 같은 모텔임을 확인했다. 모텔 주인 진술과 CCTV 영상, 카드 기록 등을 확인해 사건 당일 건혁이 모텔에 들어온 사실을 확인했다. 여러 증거, 민하와 가을의 일관된 진술 등을 토대로 경찰은 혜성신문으로 찾아갔다.
세미의 불륜 사실 때문에 이성을 잃은 건혁은 회사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경찰은 건혁의 사무실을 거쳐 옥상으로 올라갔다. 건혁을 경찰이 체포하려 하자 건혁은 손을 뿌리치고 옥상에서 뛰어내릴 듯이 난간으로 달렸다. 경찰은 공포탄으로 겁을 줬지만 건혁은 다시 달렸고 그 순간, 건혁의 다리에 경찰의 총알이 박혔다.
건혁은 경찰, 검찰을 거쳐 법원에서 형이 확정돼 교도소에 수감됐다. 국세청 감사관은 세미와 그 남자의 조사를 마친 뒤 인사위원회에 중징계 처분을 요청했고, 둘은 직위 해제됐다. 가을은 불안 장애로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민하는 복수에 성공했다는 기쁨보다 현실을 견뎌야 했다. 어떻게 알려졌는지, 국세청 직원들은 민하가 투서를 보냈다며 손가락질했고 은근히 따돌렸다. 그나마 민하는 재명이 있어 버틸 만했다. 둘은 준호 일로, 개인적인 일로 자주 대화하면서 사회생활 스트레스를 풀었다.
민하와 준호, 재명은 호수공원에서 함께 주말을 보내기도 했고 저녁에는 외식을 했다. 준호는 재명이 아빠였으면 바랐고, 민하와 재명은 제법 친해졌다. 두 사람은 불안한 세종시 생활을 이어가고 싶었다. 민하는 시간선택제로 매년 재계약해야 했고 재명은 기간제 교사로 6∼12개월씩 채용에 응해야 했다. 끝
<되돌아온이들> 8-2편을 끝으로 <떠난이들> 연재를 마칩니다. 약 11개월의 여정에 함께 해준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잠시 휴식기를 갖고 새로운 작품으로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