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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창호 Sep 17. 2023

떠난이들_7-2(7편 완)

이창호 연작소설_되돌아온이들

귀환


1


인범이 지수를 처음 본 건, 한 여름밤더위에 잠이 오지 않아 집 앞 공원에 나갔을 때다. 지수는 며칠을 굶은 사람처럼 야위었고 얼굴은 귀신같았다. 머리는 산발에 짙은 화장이 눈물에 흘러내려, 보기 흉했다. 문득 인범은 광인이 아닐까 생각했다. 인범이 지수를 빠르게 지나치려는데,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대성통곡 수준이었다. 인범은 ‘혹시 무슨 일이 나진 않을까?’라는 걱정에 그녀 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무슨 일이세요?"

"으아아 앙, 으아앙…"

그 순간 지수는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말을 건넨 인범이 이야기를 들어줄 것 같아 울음을 멈췄다. 인범은 그녀가 광인은 아닌 것 같아서, 그때부터 주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지수를 다독였다.

"울지 마세요. 그리고 지금 주무시는 분들이 많은데, 울면 민폐예요. 진정하고 왜 그런지 말씀을 해보세요."

지수는 누군가와 만남부터 헤어짐까지 인범에게 털어놨다. 한 번도 어디에 말하지 못했던 걸 털어놓고 나니 지수는 속이 후련했다. 인범은 ‘이 사람이 드라마 속 이야기를 착각해서 하는 건가?’라고 의문이 생겼다. 지수 말대로라면, 지수가 바텐더로 일하던 곳에 그가 손님으로 왔고 처음 마주한 그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액션배우와 외모가 비슷했다.

처음 그는 지수를 매일 같이 보러 오고, 그때마다 지수를 금옥같이 챙겼다. 그렇게 지수는 그에게 호감이 생겼고 밖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처음 식사한 날, 미묘하게 태도가 바뀐 그는 이어진 술자리부터 본색을 드러냈다. 지수에게 술을 먹이고 모텔로 데려간 그는 그녀를 취했다.

이후 만남은 이어졌지만 지수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많이 달라졌다. 항상 부하 다루 듯했고 지수도 정신 지배를 당했는지, 그런 그의 태도를 받아들였다. 지수가 그에게 "언제 이혼하냐"고 물으면 그는 화를 내고 그 자리를 떠나기도 했다. 그렇게 만남을 이어가던 중 지수는 임신했다. 그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낙태하라"고 했고, 그래서 지수는 지금 공원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은 것이다.

인범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지수의 말을 듣고 있었다. 갑자기 지수는 "잠깐 기다려달라"며 편의점으로 뛰어갔다. 인범에게 두유를 건넨 뒤 말을 이어갔다. 지수는 푸념을 조금 더 한 뒤, 마음이 안정됐는지 인범에게 감사 인사했다.

"고마워요. 제 얘기 들어줘서요. 괜찮으시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인범은 지수에게 명함을 건네고 집으로 돌아왔다. 지수를 만난 날은 인범이 아내를 만나기 일주일 전이었다.


2


우주일보 사옥 앞, 인범은 큰 숨을 한 번 내신 뒤 사무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아이고 이게 누구야, 인범이 아니냐, 반갑다."

인범에게 반갑다고 손을 내민 사람은 혜성신문에서 인범과 함께 근무했던 부서장이다. 우주일보는 레테르(신문사명의 고유성)면에서 우주시내에서 으뜸이었다. 게다가 이 부장은 부국장으로 승진해 이직했으니 스카우트 제안을 받고 우주일보로 왔다. 인범은 이 사람이 반갑지만은 않았다.

인범을 바라보는 우주일보 내 시선을 곱지 않았다. 인범이 우주시 지역신문 출신이긴 하지만, 우주일보 직원들은 한양경제에서 저승사자로 내려보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인범의 업무범위 내 그런 것도 있었다. 일종의 감찰반 역할이었다. 특히 인범은 한양경제 연봉을 그대로 받기 때문에, 선배들은 자기보다 급여를 더 받는 인범이 탐탁지 않았다.

한양경제에서 우주일보로 근무지를 바꾼 사람은 인범 말고도 더 있다. 시경캡으로 인범과 호흡을 맞췄던 사회부 차장 윤기다. 윤기는 우주일보로 자리를 옮기면서 승진했고 신설된 탐사보도부 부장이 됐다. 인범은 그 팀 차장대리를 맡았고 팀원을 우주일보에서 뽑아야 했다. 이들은 팀원을 구하는데, 급할 게 없었다. 호흡이 맞지 않는 사람은 없는 게 낫기 때문이었다.


3


인범이 우주일보로 오기 몇 달 전, 한수는 거성항공으로 자리를 옮겼다. 홍보팀 과장으로 들어간 한수는 신문기자 때보다 연봉이 많고 업무 강도가 낮아 만족했다. 거성항공은 공항공사에 출입하던 한수가 기사를 부정적으로 쓰자, 차라리 데리고 오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한수의 능력을 높이 산 게 아니라, 혜성신문에 계속 씹히는 기사가 나가는 게 싫었다.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수는 같이 공항공사에 출입하던 기자들에게 대접하고 싶었다. 잘 보이고 싶은 것도 있지만 ‘내가 대기업에 들어와 너네들 술 사주고, 광고도 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한수는 팀장에게 승낙을 받아, 지역신문 5곳과 통신사 1곳 출입기자들을 모았다. 고급식당에서 소고기를 먹은 이들은 2차로 생태하천 주변 분위기 있는 맥주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들 소고기집에서 소맥을 7∼8잔씩 먹은 멤버들은 술이 꽤 취했다.

취기가 많이 오른 우주일보 기자가 한수의 눈에 띄었다. 입사 4년 차인 유라였다. 2차에서 생맥주를 마신 일행은 각자 택시를 잡아 귀가했다. 한수는 유라와 같은 방향이라며, 함께 택시를 타자고 제안했다. 유라는 취기와 졸음이 몰려와 정신이 희미했다.

택시에 탄 한수는 유라와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한수는 유라의 허벅지에 손을 댔다. 유라는 택시에 오르자마자 잠이 들어 한수가 허벅지를 쓰다듬는지도 몰랐다. 유라가 깊이 잠들었다고 판단한 한수는 허리를 감싸고 가슴을 만졌다. 그 순간 정신을 차린 유라는 한수를 밀친 뒤 외쳤다.

"기사님, 택시 세워주세요."

택시기사가 차를 세우자, 유라는 회사 선배에게 성추행 사실을 알렸고 한수는 억울하다며 애꿎은 가로수를 때렸다. 유라의 선배는 경찰에 신고하라고 했다. 경찰이 나오자 한수는 성추행 사실을 발뺌했지만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

유라는 경찰서에서 성추행 사실을 진술하고, 경찰이 한수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는 것을 보고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4


지수는 우주시내 한 모던바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사흘째 되던 날 그를 만났다. 그는 지수에게 직업이 기자라고 했고, 그 계통을 알지 못하는 지수에게 그의 세상은 신기했다. 다양한 분야의 유명한 사람들을 만나고 알고 있다는 그가 신기했다. 또 그는 액션배우처럼 학창 시절부터 싸움을 잘했고 유도선수 출신이라고 하니, 지수는 그가 더 믿음직했다.

그는 지수가 일하는 바에 일주일에 2∼3회 찾아왔고 올 때마다 작은 선물을 들고 왔다. 하루는 장미꽃 한 송이, 어느 날은 물 건너온 초콜릿, 지수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 몫까지 커피를 챙겨 오기도 했다. 지수와 그는 그렇게 만날 때마다 짧게는 1시간 길게는 3시간 정도 대화를 나눴다. 지수는 대화 도중 그가 기혼자임을 알게 됐고, 알고 나니 아쉬웠다. 그는 취재원으로 알고 지내던 중소기업 사장 딸과 결혼했다.

"아이가 생겨서 어쩔 수 없이 결혼했는데, 성격이 안 맞아서 결혼생활 내내 다투기만 해서 곧 이혼하려고 해요."

그의 한 마디에 지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조만간 회사를 옮길 예정인데, 대기업이라 연봉도 많이 오른다고 했다. 지수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가끔 허풍을 섞어가며 말했다. 지수는 눈에 콩깍지가 씌었는지 그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지수는 전라도의 한 어촌에서 자랐고 장학금을 받으려, 그 지역 국립대에 들어갔다.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대학을 졸업했다. 그곳에서 취직할 수 있었지만 서울에 둥지를 틀고 싶어 우주시로 왔다.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고모집에서 얹혀살던 지수는 그 동네를 떠나고 싶었다. 지금은 취업을 준비하면서 바텐더로 생활비를 벌고 있다.

어느 날, 지수와 그는 한참 대화하던 중 서로 이름도 모르고 있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서로 나이도 궁금해했다. 지수는 20대 중반, 그는 30대 후반이었다. 둘은 12살 차이가 났다. 그는 지수에게 이름을 알려줬다.

"한수예요."


5


대기업 홍보팀에서 적응을 마쳤을 즈음, 한수에게 ‘인범이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한수는 수용을 만났다.

"야 그 새끼가 한양경제에서 우주일보로 왔는데, 완전 에이스여서 아무도 못 건든다는데? 이거 옛날 얘기 꺼내면 어떡하냐?"

"걱정 마, 그 새끼 그거 쫄보여서 그렇게 못할걸. 한 번 만나서 윽박지르면 꼼짝 마라지 뭐."

"그런가? 야 한 잔해. 요즘 내가 거기 바에 새로운 애 있거든, 걔 작업하고 있잖아. 조만간 열매를 맺을 거야, 그럼 내가 새끼 칠게 하하하."

다음날, 한수는 인범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인범 기자님, 저 한수입니다. 거성항공 홍보팀에 있는, 어떻게 서울에서 번창하셔서 인천으로 오셨는데 제가 한 번 모셔야죠."

"네 선배님 오랜만입니다. 모시긴 제가 모셔야죠, 언제든 불러주시면 나갈게요, 연락 주십시오."

날짜와 시간 약속을 잡은 뒤 전화를 끊은 한수는 묘하게 변한 인범이 기분 나빴다. 인범은 한수의 문자메시지를 보고 우주시청 근처 중국음식점에 도착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우주일보로 온 예전 자신의 부서장인 부국장이 앉아 있었다.

"어 인범아, 한수가 너랑 만나는데 시간 되면 오라 길래 먼저 왔다."

"네, 함께 보면 좋죠."

잠시 뒤 한수가 들어왔고 세 사람은 식사를 시작했다. 고량주 잔이 몇 순배 돌자 인범은 술기운이 오르는 편이었다. 한수와 부국장은 옛날 얘기를 하며 즐거워했다. 인범은 맞장구는 쳐주지만 미소만 보일뿐 즐거워하진 않았다. 부국장이 잠시 화장실에 가자 한수는 인범에게 말을 걸었다.

"야, 너가 서울에서 잘 나갔다고 인천에서도 잘 될 거 같냐? 너 이 새끼 그때 그일 말하고 다니면 가만 안 둔다, 내가 기자 그만뒀다고 어떻게 못할 거 같냐."

인범은 고량주를 한 잔 마시고 입을 열었다.

"왜 이 씨발아, 공무원 하는 우리 형들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하고 나 폭행한 거 알려질까 봐 두렵냐. 대기업 홍보팀 가더니 배때지가 불러서, 잃을 게 많아서 두렵냐? 니 처신이나 잘해, 남 걱정하지 말고."

한수는 그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경멸> 배민채 2023. 12.


6


인범과 윤기는 이제 막 수습기자가 끝나, 정기자로 발령받은 후배를 팀원으로 받았다. 윤기는 팀원들을 모아놓고 탐사보도할 아이템을 정했다.

"공항이 있는 우주시에서 성장하고 대학도 갖고 있는 거성항공 말이야, 여기 국적항공사인 데다 해외 노선도 상당수 독점하고 있는데 어떻게 말썽 하나 없지?"

"거성항공이 언론사에 전방위적인 로비를 합니다, 광고도 많이 하고요. 또 대학교에서 언론인들은 무료로 대학원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해주고, 우주시 공무원이랑 기자들하고 자리도 대학교 홍보팀이 만들기도 하는데요 뭘."

"그래 그러면 여기 관련자료를 싹 긁어모아보자, 대학교 자료는 교육부에 정보공개 청구하고 특성화캠퍼스 사업은 우주시에 요청하고, 거성항공 자료는 국토부랑 공항공사에서 최대한 받아내자고."

인범은 새로 온 후배에게 정부와 지자체에 정보공개 청구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이미 공개된 자료 수집도 꼼꼼히 해두라고 했다. 인범은 진풍에게 전화를 걸어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꺼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거성항공 관련해 혹시 정보 있으시면 염치 불고하고 공유받을 수 있을까요?"

"맨입으로 되겠니? 하하하. 장난이고 얼마 전 제보받았는데, 위에서 장난질해서 기사가 나가지 않은 게 몇 건 있어."

인범은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라고 생각한 뒤 진풍에게 "저 좀 만나주세요. 제가 술 한 잔 살게요"라고 말했다.

진풍은 거성항공 회장 둘째 딸이 동화작가로 데뷔했는데, 베스트셀러로 만들기 위해 거성항공이 그 책을 수 천 권 사들였다고 했다. 또 첫 째 딸이 술에 취해 말리는 이사의 따귀를 때리고 욕설을 퍼부어 사내게시판이 난리가 났다고 했다. 결국 그 이사는 치욕스러움 때문에 이직했다.

진풍은 인범에게 제보자를 소개했다. 제보자는 본인의 신분이 드러나지 않게 해달라고 당부하며 사진, 영상, 녹음파일, 서류, 사내게시판 내용 등 모든 자료를 인범에게 줬다. 인범은 윤기와 상의해 첫 째, 둘째 딸을 추적했고 연락처와 사는 곳을 확인했다.

인범이 해명을 받고자 전화와 문자메시지로 연락해 봤지만, 두 사람 다 홍보팀에게 문의하라며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인범과 윤기는 각자 한 명씩 집 앞에서 기다렸고 결국 두 사람은 증거가 확실하자, 사실관계는 인정했다. 인범과 윤기에게 "얼마면 되냐"고 매수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두 사람 다 홍보팀에 "이번 건을 막지 못하면 다 옷 벗을 줄 알라"고 명령했다.

한수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인범을 찾아가기에는 자존심이 상해 우주일보로 윤기를 찾아갔다. 윤기는 완고했다. 탐사보도부는 우주일보 편집국장도 손댈 수 없는 별동대였다. 우주일보 신문에 실리지 않아도, 윤기에게 인터넷기사를 포털사이트로 바로 전송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어 아무도 기사를 건들지 못한다.

한수는 별 수 없이 인범을 찾아가 바짝 엎드렸다.

"인범 기자님, 미운 정도 정이라고 알고 지낸 세월이 있잖아요. 이번 일만 잘 넘어가면 제가 잘 아는 구청장들에게 형님들 승진도 부탁하고, 항상 인범 기자님 좋은 곳으로 모실게요. 제가 처자식이 있어서 먹고사는데 지장이 생깁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미 내 손을 떠났어요, 기사를 써서 부장에게 건넸고 송고 여부는 오직 부장만 결정할 수 있어요. 미안하네요."

그 순간, 윤기는 기사 송고 버튼을 눌렀다.


7


인범의 기사가 포털사이트를 통해 전국에 알려지자, 모든 언론사가 전부 인용 보도를 했다. 또 언론사별로 경쟁이 붙어, 이직했다는 이사를 찾아 내 인터뷰 기사를 내보낸 곳도 있었다. 인터넷서점 업계에서 자료를 받아 거성항공이 둘째 딸 책을 얼마나 샀는지도 정확하게 알려졌다. 그 책이 사내 한 구석에 방치돼 있는 사진도 내부자로부터 공개됐다. 경찰 압수수색 등 강제 수사가 이어졌고 두 딸은 피의자로 조사를 받아야 했다.

조사를 받고 나온 두 딸은 홍보팀 사무실로 찾아왔다. 사무실 집기를 마구 집어던진 그녀들은 한수를 찾았다.

"여기 기자 출신 있다면서? 누구야? 어 누구냐고?"

한수가 일어서자 첫 째 딸이 뺨을 갈겼다. 둘째 딸은 욕을 퍼부었다.

"어디서 이 따위 걸 뽑아가지고 너 이 씨발, 월급 누가 주냐? 우리가 주는 거 아니야? 이거 하나 처리 못해서 이런 수모를 당해야 돼? 넌 당장 해고야, 꺼져 꼴도 보기 싫으니까."

한수는 마음 같아선 사무실 문을 뻥 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장인어른이 두려웠고 처자식 걱정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8


"안녕하세요, 인범 기자님. 저 지난번 공원에서 만났던 사람입니다, 혹시 저를 만나주실 수 있을까요?"

인범이 지수를 다시 만난 건, 횟집이었다. 지수는 인범에게 감사하다며 회 한 접시에 소주를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인범은 일이 덜 끝났다며 술을 거절했고 지수만 술잔을 들이켰다. 인범이 조심히 물었다.

"저기, 그때 임신하셨다고 했는데 술을 그렇게 마셔도 괜찮으세요?"

"크, 쓰다 써. 이게 뭐 좋다고들 마시는지 참, 아이요? 지웠어요, 이제 저 혼자예요."

인범은 말을 잇지 못했다. 지수는 부모님 없이 자라 한수가 자신을 막대해도 아이는 낳아서 키우고 싶었다.

"저는 그 인간이 못 됐어도 애는 키우려고 했거든요. 근데 그 남자가 저를 강제로 자기가 아는 산부인과로 끌고 가는 거예요, 제가 힘으로 어떻게 이깁니까. 그렇게 됐어요, 애초에 사실 저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강제로 당한 거거든요. 그래도 애는 낳고 싶었는데…"

"지수 씨라고 했죠? 그 사람 아직 좋아하세요? 제가 보기에 신고를 하는 편이 낳을 거 같아서요, 처음부터 끝가지 지수 씨가 이용당한 거 억울하지 않아요?"

"그 사람 기자였대요, 그리고 지금 대기업 과장인가 그렇다네요. 제가 그런 사람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요?"

"기자요? 이름이 뭔가요?"

"한수래요."

"지수 씨, 제가 책임지고 이길 수 있게 해 드릴게요. 응어리까지 풀어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소송하면 위자료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다음날, 지수는 인범의 안내대로 경찰서 여성청소년과를 방문해 그동안 있었던 일을 진술하고 신고 접수했다.


9


경찰서를 도는 문화가 남아 있는 신문사를 통해 지수가 한수를 신고한 사실이 알려졌다. 또 앞서 벌어진 유라 성추행 사건도 기자들 사이 정보보고라는 형태의 메모로 돌기 시작했다. 거성항공이 전국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을 때라, 전 신문기자이자 거성항공 홍보팀 과장인 한수의 사건은 기자들에게 흥미를 유발했다. 소식을 들은 수용이 한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너 아무래도 도망치던지, 자수하던지 해야 할 거 같다. 지금 보도하려고 준비 중인 곳이 한 둘이 아니고, 거성항공 뭐 하나 걸렸다 하면 개떼같이 몰려들잖아."

"왜 뭔데?"

"너 다른 여자 만나서 낙태시켰다며? 그리고 우주일보 여기자 가슴도 만졌다는데 맞아?"

"누가 그래?"

"경찰서에 사건이 다 접수돼 있대."

"아 그 우주일보 건은 경찰에 친한 형님한테 사건 진행되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해 놨는데."

"그게 근데 그 낙태한 여자가 준강간으로 신고하면서 2개 사건이 다 진행된다는 거 같다, 지금 여론이 좋지 않아."

"알겠어, 고마워 연락할게."

한수가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까, 휴대전화 번호 목록을 살피던 중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한수 씨 되시죠? 경찰서인데요. 준강간, 강제추행 혐의로 조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무슨 요일이 편하세요?"

"금요일에 연차 내고 가겠습니다."

한수는 변호사를 선임해 함께 조사를 받고 나왔다. 강제추행 혐의는 인정했지만 준강간은 합의한 일이라고 진술했다. 경찰서에서 나온 한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한수의 장인이었다.

"기자 출신의 거성항공 홍보팀 직원이 강간을 했다는데, 이거 자네 아닌가?"

"아 약간 오해가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강간이 아니라 쌍방 합의하고…"

"뚝."

경찰은 모텔 CCTV 영상을 확보했고 지수가 한수에게 끌려간 날, 지수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걸 확인했다. 조사 전 이미 한수가 사실관계를 부인하면 구속영장을 신청하려고 했다. 곧바로 영장을 신청했고 검찰을 거쳐 법원에서 발부됐다. 한수는 인천구치소에 수감됐고 검찰은 구속 기소했다. 재판이 시작되자 한수는 죄를 인정하고 반성문을 수차례 써내고 처자식 핑계도 대봤지만 징역형이 확정됐다.

형이 확정되자 인범은 한수에게 면회를 갔다. 한수는 면회를 거부했다. 인범은 한수에게 편지를 보냈다. 5만 원권 두 장과 함께 온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교도관 조직도나 그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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