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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비 Sep 29. 2023

몽롱함 속에서 만난 맑은 눈

[태국 북부 여행] Day 18 - 빠이

 이 글은 빠이에서 만난 두 남자 Episode No.2이다.


 유대인과의 우연한 동행이 궁금하면 Episode No.1(이전 글)을, 몽롱함 속에서 만난 맑은 눈을 가진 친구와의 이야기가 궁금하면 Episode No.2(본 글)을 읽어주길 바란다.


빠이에서 만난 두 남자 - Episode No.2

몽롱함 속에서 만난 맑은 눈


#빠이를 세 단어로 정의하자면

#그린라이트인가

#맑은 눈을 가진 그의 직업


#빠이를 세 단어로 정의하자면

 빠이에서의 마지막 밤인 어제는 왠지 모를 아쉬움에 숙소로 돌아가기 싫었다. 나는 졸려하는 친구를 먼저 숙소에 보내놓고 홀로 빠이의 워킹스트리트를 걸어 첫날 꽂혔던 찻집을 찾아갔다.


 문이 따로 없이 탁 트인 찻집 가운데는 커다란 항아리 세 개에 각각 다른 차가 끓고 있었다. 차를 시키면 큰 항아리에서 나무 국자로 차를 퍼서 담아주는데, 그 모습이 꼭 동화책에서 나오는 마법 항아리에 담긴 마법 물약 같기도 했다. 나는 찻집 한가운데에 있는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대고 따뜻한 차를 홀짝이며 여독을 풀었다.  

 그때, 찻집으로 들어오는 내 또래의 긴 곱슬머리 여자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종아리까지 오는 민무늬 면 원피스에 통 큰 면바지를 받쳐 입고, 무언가 주렁주렁 달린 긴 가디건을 걸치고, 축 쳐진 천가방을 멘, 딱 히피룩의 정석을 보여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녀는 안에 있던 몇 사람과 웃으며 인사하더니 바닥 앉아 대마를 말아 피우기 시작했다. 살짝 드러난 그녀의 목과 팔에는 검은 타투가 보였다. 몇 분 후 정돈되지 않은 긴 흰머리의 할머니가 히피스타일 옷을 입고 마찬가지로 축 쳐진 천가방을 메고 들어왔다. 할머니는 앞서 온 여자와 포옹하며 인사하더니 자리에 앉아 긴 담뱃대에 대마를 피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뻐끔 뻐끔 담배를 빨더니 벽에 등을 대고 편안하게 누웠다. 내 바로 뒤에 있던 남자들은 서로 담소를 나누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담배를 조금 피우더니 기타와 드럼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찻집에 있는 모든 구성원들이 자아내는 이 몽롱한 분위기와 이색적인 풍경에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 사람들은 휴식을 위해, 위안과 낙을 찾아 이 찻집을 들어왔을 터였다.


 저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나는 이제 빠이를 딱 세 단어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히피, 대마, 타투'이다. 그 이유는 이 세 가지 특징을 가진 사람들이 많기도 하거니와 그 사람들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샵들이 정말 많이 있기 때문이었다. 찻집에서 서서히 들여다본 빠이는 아주 뚜렷하고 독특한 자신만의 짙은 매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저 중에 어떠한 특징도 없지만 그냥 빠이가 좋다. 빠이가 가진 뚜렷하고 짙은 매력은 이색적인 매력을 풍기지만, 작은 시골동네가 주는 편안함과 아늑한 느낌은 나에게 친근함을 주기도 한다. 빠이가 가진 짙은 매력과 은은한 매력이 동시에 나를 끌리게 하는 것 같다.

#그린라이트인가

 찻집에서 혼자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엄청나게 큰 사람 한 명이 내 대각선에 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나와 같이 혼자인 것 같았다. 그는 차를 홀짝이더니 찻집 안에 들어가 이것저것을 사 왔다.


 나는 무심코 그가 어떤 물건을 샀는지 쳐다보다 나를 보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뭐야 잘생겼잖아...?‘ 살짝 웃어 보이는 그에게 나도 미소로 답하며 무엇을 샀는지 물었다.


 그는 자신이 산 비누를 보여주며 친절하게 비누 포장을 벗겨 내게 건네주며 냄새를 맡아보라고 했다. “킁킁, Smells pretty good." 우리의 대화는 그렇게 시작됐다.


 190이 넘는 키에 전형적인 백인인 그는 남아공의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이라고 했다. 나는 그가 남아공 사람일 거라 생각도 못했는데 그는 내가 한국인임을 단 번에 알아맞혔다. 나름 히피룩을 따라 하겠다고 빠이에서 산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전혀 통하지 않았나 보다. 그는 부산에서 1년 정도 어학원을 다녔다고 했는데 아마 그래서 내가 한국인임을 척 알아본 것 같았다.


 나름 한국어를 알아듣는 그와는 이야기가 잘 통했다. 그는 부산에서 지낸 이야기, 부산에서 사귄 여자친구 이야기 등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그의 눈은 파란색과 초록색의 중간정도의 색이었는데, 몽롱한 찻집 분위기와 달리 선명하고 맑아 보였다.


한창 이야기가 오가다 그가 내게 물었다.

"You wanna walk a little bit?"


‘어...? 이거 그린라이트인가?’ 싶었지만 (나는 도끼병이 꽤 자주 도진다.) 심심한데 이 친구랑 좀만 더 놀고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에 좋다고 답했다.


 찻집을 나서는 그는 맨발이었다. 그에게 신발이 어딨냐고 묻자 그는 웃긴 표정을 지으며 “신발? 몰라? 여긴 한국과 달리 안 신어도 돼"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흠... 그는 평소에도 신발을 잘 안 신는 것 같았다.


 그는 빠이에서 최고 맛있는 초콜릿집이라며 워킹스트리트에 있는 수제 초콜릿가게로 나를 데려갔다. 우리는 엄청 크고 달달한 초콜릿을 하나씩 먹으며 워킹스트리트의 상점들을 둘러보고 노래가 들려오는 술집들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그와 함께 걸으며 나는 그에게 내가 빠이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려주었다. 히피룩을 위해 바지를 산 이야기, 머리를 땋은 이야기, 스티커 문신을 한 이야기 등을 했더니 그는 내가 어이없는지 큰 소리로 웃어 젖혔다. 날카로운 콧날과 한 없이 높은 키와는 다르게 웃는 것은 꼭 어린아이 같아 보였다. 어느새 우리는 꽤나 편해진 것 같았다.

#맑은 눈을 가진 그의 직업

 그는 해외 곳곳에서 1년씩 살아보는 중이라고 했다. 부산에서도 1년, 인도에서도 1년, 지금은 빠이에서 2달째 사는 중이라고 했다. 나도 역마살이라면 남들에게 뒤지지 않는 편이지만 그와 같은 삶을 선택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는 군인인가? 싶었다. 체구가 크고 몸이 단단해 보이기도 했지만 군인같이 빡빡 민 머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예상은 완전 빗나갔다.


 그는 빠이에서 Cacao ceremony를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말에 나는 갸우뚱했다. 그의 설명을 대략 정리하면 Cacao ceremony는 명상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인데, 진행자가 리드를 해주면 참석자들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이야기를 하며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름에 Cacao가 들어가는 이유는 카카오닙과 꿀을 섞은 차를 마시며 하기 때문이랬다.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인스타를 보여주었다. 잘 이해는 안 되지만 특정 종교는 아닌 것 같고... 그냥 명상 혹은 상담의 한 종류인 것 같았다.

 그의 직업을 듣고 나니 그제야 그의 맨발, 스님 같은 복장, 민 머리, 그리고 유독 맑은 눈... 이 모든 것이 들어맞았다. 그는 인도에서 지내며 Cacao ceremony에 참석했었는데 그때 심정에 큰 변화를 느끼고 지금은 직접 진행까지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 시간이 있으면 ceremony에 오라고 했지만 나는 치앙마이로 돌아가야 해서 못 간다고 말했다. 그는 아쉬워하며 자신의 집이 근처인데 잠깐 구경하고 싶으면 같이 가봐도 된다고 말했다. 앞에 물도 흐르고 부엌도 있는 집이라고 했다.


 한국이었으면 바로 경계했을 법한 그의 말이지만, 명상을 업으로 하는 그가 이런 말을 하니깐 이게 진짜 순수한 의도인지 아닌지 헛갈리기도 했다. 만약 친구와 함께 있고 대낮이었다면 궁금한 마음에 가봤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웃으며 칼같이 거절하고는 그와 헤어졌다. 그의 의도가 정말 순수했다면 미안하지만 조심하는 것이 당연히 맞았다.


 그가 요즘 작업하고 있다는 인스타를 팔로우했다. 인스타를 보니 그가 어떤 일을 하는지 좀 더 이해가 됐다. 구글에 cacao ceremony를 검색하여 영어를 읽어가며 공부까지 했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새로운 분야를 알게 되는 것이 나에겐 묘미인 것 같다.


 빠이에서는 다양한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뜻깊은 시간을 보낸 것 같다. 내가 특히 외국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이유는 그들과의 대화는 그저 대화 그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는 너무나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그저 서로의 삶을 공유했을 뿐인데도 수많은 생각과 고민을 갖게 되고, 생각이 전환되기도 하며, 때로는 그 대화가 나의 삶의 방향까지 바꿔 놓기도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겠지만 그들은 나에게 묵직하고 진한 여운을 주었다. 나의 좋은 이야기와 추억이 되어 준 두 청년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 앞으로도 내 삶을 더욱 뜻깊은 대화와 이야기와 추억으로 부지런히 채워가고 싶다.




 [오늘의 리뷰]


1) 찻집 - Malamong Art Cafe

https://maps.app.goo.gl/PsaLmX4Wqy8GkYt2A?g_st=ic

 저녁에 가는 것을 추천한다.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대마는 조심하시길! 하지만 자신이 나서서 사지 않는 이상 대마를 권유하거나 하게 될 확률은 거의 없으니 안심하자. 코지한 분위기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빠이의 매력을 강하고 잔잔하게 맛볼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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