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
1학년을 마치고 밴쿠버로 돌아올 즈음 아버지는 새로 사업을 시작했다. 겨우겨우 끌고 가던 샌드위치 가게가 남의 손에 넘어가고 이 년 정도가 지난 후였다. 시간은 잘만 흘렀고 아버지는 캐나다 정착 후 3년 이내에 영주권에 명시된 조건을 충족해야 했기 때문에 조바심이 났다. 돈을 주면 아는 사람 회사에 이름을 올려 주고 그걸로 조건을 떼 주겠다는 브로커도 있었으나 한인사회에서는 그런 사람한테 사기당하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에 그런 건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예전 직장동료였던 찰스 아저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캐나다 북쪽에 옐로우나이프라는 도시가 있는데, 거기에 있는 모텔을 50대 50으로 인수해서 같이 경영하자는 것이었다. 옐로우나이프는 사실 도시라 부르기도 뭣한 수준이지만 캐나다 북쪽에 매장되어 있는 금이나 다이아몬드 같은 자원들을 조사하는 회사들이 베이스캠프로 삼는 곳이다. 그래서 그 동네 숙박시설에는 동네 사람들 뿐 아니라 여러 다국적 기업들의 직원들이 자주 묵었다. 아버지는 누구랑 동업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동업은 좋지 않게 끝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게다가 아버지는 자기가 사람 보는 눈이 굉장히 날카롭다고 믿는 전형적인 어수룩한 아저씨였기 때문에 사람을 너무 믿거나 이유없이 멀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친가나 외가 쪽 집안에는 특별히 가훈이랄 건 없는데, 하나 있는 건 "전라도 사람을 조심해라"였다. 아마 나의 조상들은 전라도 사람들에게 몇 번 데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전라도 흉을 보면서도 어쩐지 전라도 출신 친구들이 많았다. 어머니는 동업을 하겠다고 하자 지나가는 식으로 "그 사람 전라도 아냐?" 하고 묻자 찰스 아저씨는 몇 년 동안 중동에서 동고동락한 아주 믿을만한 사람이고 전라도는 더더욱 아니라고 확신에 찬 대답을 했다. 아버지는 뭔가 유별난 걸 좋아했고 거기에 따라오는 위험요소들을 과소평가했다. 중국집에 가면 남들 다 시키는 요리 대신에 메뉴판 구석에 이런 것도 있나 싶은 음식들을 시켰고 그런 음식들은 인기메뉴가 아니었기 때문에 맛도 없었고 회전이 안 되는 오래된 재료가 들어갔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남들과 다른 걸 시켰다는 것에 의의를 두는 사람이었다. 캐나다 최북단의 도시 옐로우나이프, 눈폭풍이 몰아치는 광야에서 곰사냥을 하는 거친 원주민들, 은빛 여우를 비롯한 온갖 야생동물들, 혹한과 개썰매, 광활한 대자연... 이런 것들에 매혹된 아버지에게는 전라도 출신 뿐 아니라 전라도 할애비가 와도 투자를 할 결심이 서 있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기가 이제 그런 곳에서 사업을 하게 되었다고 자랑을 했다. 아버지의 장담과는 다르게 찰스 아저씨는 전라도 사람이었고 몇 년 후 그 집 부부와 대판 싸우고 집에 와서 어머니는 "둘 다 전라도던데 무슨!" 하고 면박을 줬다. 아버지는 "그때는 그렇게 말 안 했는데..." 하면서 얼버무렸다.
찰스 아저씨네와 사이가 틀어진 이유는 그 아저씨네가 모텔 공금을 해 먹는 속도가 우리보다 월등히 빨랐기 때문이었다. 이민 와서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은 세금을 아끼려고 별별 수를 다 쓴다. 한국의 중소기업도 비슷하다고 한다. 아이들과 아내들을 직원으로 올리고 월급 명목으로 돈을 빼내고, 밴쿠버에서 가족들이 타고 다닐 차를 법인 명의로 경비처리하는 정도는 일상이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너도 월급 받는 직원이야 인마” 하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컴퓨터가 안된다며 나에게 전화를 했고 나는 숙제를 하다 말고 전화통을 붙잡고 "그거 스타트 버튼 있죠, 그거 누르고, 프로그램 파일 가서 위에 것 눌러봐요, 그럼 지금 모니터에 뭐라고 나와요? 그래요? 그럼 오른쪽 마우스를 누르고..." 식으로 모텔 컴퓨터들을 손봐줬다. 나중에는 너무 자주 전화가 왔기 때문에 pcAnywhere란 프로그램을 깔고 모뎀으로 모텔 컴퓨터에 접속해서 원격으로 컴퓨터를 고쳤다. 아버지는 “요새 어린애들은 컴퓨터는 기본이니까” 하면서 내가 일하는 걸 대수롭지 않아 했지만 찰스 아저씨도 자신의 아들 대신 내게 뻔질나게 컴퓨터를 봐달라고 전화를 했다. 그 집 아이들도 월급을 꼬박 받고 있었지만 별로 모텔에 도움이 되는 일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여름방학 때 두어 번 정도 가서 머물면서 일도 했었지만 그 집 아이들은 그런 후진 동네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옐로우나이프는 당시에는 제대로 정신이 박힌 젊은이라면 도망가는 게 정상인 곳이었다. 알코올중독자가 인구당 가장 많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관광도시로 유명한 앨버타의 밴프에서는 예전에는 밤에 술집에 가면 동네 젊은 여자들이 죽치고 있다고 들었다. 외지에서 놀러 온 남자들과 눈이 맞아서 밴프를 뜨는 게 목표인 여자들이었다. 하지만 옐로우나이프에서 예쁜 여자는 본 적이 거의 없다. 시내 한가운데 사거리에서 날이 좋은 여름에 비키니 상의를 입고 핫도그를 파는 젊은 여자가 있었는데, 맞은편에도 핫도그를 파는 노점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비키니 앞에 길게 줄을 섰다. 그 앞의 술집은 캐나다에서 면적당 매출이 제일 높은 곳이라는 말이 있었다. 물류운송이 쉽지 않은 옐로우나이프의 물가는 다른 곳의 두 배였다. 에드먼턴에서 옐로우나이프 사이의 육로에는 호수가 있는데, 여름에는 페리가 다녔고 겨울에는 얼어버린 호수 위로 트럭이 다녔다. 그래서 얼음이 막 얼거나 녹을 무렵인 이른 봄과 늦은 가을에는 육로 교통이 불가능했고 그때는 식료품점에 신선한 식품이 동이 났다.
원래는 찰스 아저씨와 아버지는 3개월씩 교대로 일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그 약속이 지켜졌지만 시간이 지나자 아저씨는 집안에 무슨 일이 있어서, 혹은 몸이 안 좋아서 한 달 정도 더 일해달라고 걸핏하면 아버지에게 요청했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사정이 있대잖아..." 하면서 일 년에 8개월씩 옐로우나이프에서 지냈다. 그렇게 호구짓을 알아서 하던 아버지도 이건 뭔가 잘못되어 간다고 느끼게 된 계기는 밴쿠버에서 돌아와서 모텔 금고를 들여다보면 항상 얼마씩 돈이 비는 걸 눈치채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나중에는 부부가 그냥 대놓고 회사 공금을 가져다 쓰기 시작했고 금고는 텅텅 비어갔다. 도시에 다른 모텔들이 생기면서 매출까지 줄어들자 그 집과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했지만 아버지는 집안에서만 큰소리칠 줄 알지 밖에서는 목소리를 높일 줄 몰랐다.
아버지 대신에 어머니가 나서서 그 집 부부에게 욕을 한 사발 해주고 원래 투자했던 액수와 우리의 지분을 맞바꾸는 것을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화려했던 북쪽 생활도 끝이 났다. 어머니는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해서 좌중을 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찰스 아저씨의 아내도 보통 사람은 아니어서 항상 우리가 듣기 좋은 소리를 하면서 나중에는 자기네 집 자랑을 교묘하게 끼워 넣는 화법을 자주 구사했는데, 어머니는 칭찬에도 무덤덤했고 자기네 자랑이 시작되면 '그게 뭐 대수라고?' 하는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대화가 길게 지속되지 못했다. 어머니를 위시한 외가쪽 사람들은 모두들 남과 싸우는 데 이력이 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좋게 좋게 넘어가는 게 제일이라는 아버지와 결이 맞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가 없었다면 우리는 투자금을 한 푼도 건지지 못했을 것이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는 사람치고 자기 힘으로 여유 있게 살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나는 시간이 지난 후 그 모텔은 어떻게 되었나 궁금해졌고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한번 이름을 바꿨다가 그마저도 망해서 지금은 시에서 복지시설로 사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때 내가 보기에도 낡고 형편없었는데 그게 잘 됐을 리가 없다. 아마 그 집도 그 후 우리만큼 힘들게 살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