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1월 대입 수능이 끝났다.
시골에서 크고 자랐지만, 동네에서는 공부 꽤나 한다고 하여 기숙 학교를 찾아 도시로 보내진 나였다.
세상에는 정말 뛰어난 애들이 많고, 열심히 해도 안되는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쯤이었다.
똑같이 24시간 함께 지내는데 결과는 달랐고 따라 잡히지도 않는 친구들이 많았다.
수능 1교시, 2교시가 지나면서 결과가 좋지 않음을 직감했다. 시험이 모두 끝나고 아버지에게 전화하여 괜히 호기롭게 잘 봤다고 얘기했지만 전화를 끊고 억울함과 불안감에 눈물이 흘렀다.
다음날 학교에 가니 이미 가채점을 마친 친구들은 너나 할거 없이 결과에 아쉬워했다. 하지만 중간 중간 만족해하는 모습은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2000년 11월 수능은 그야말로 '물 수능'이었다. 20세기 마지막 수능이라던 그때, 66명의 역대 최대 만점자가 나왔다. 친했던 친구들로부터 전체 1개 틀렸네, 2개 틀렸네하며 아까워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 터져왔다.
그 길로 시골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 분위기는 적막했다. 내 눈치를 보시는지 부모님은 아무 말씀 안하셨다. 마냥 침대에 누워 있던 나에게 엄마가 말씀하셨다. "재수 하면 어떨까?" 누가 들어도 조심스레 말씀 하신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단칼에 거절했다. 사실 자신이 없었다. 올해 보다 잘할 자신도 없었고, 다시 시험 공부를 하고 싶지 않았다.
대학은 가야 했으니, 벽에 붙은 대학교 입학 점수표를 봐야만 했다. 여기도 안되고 저기도 안되고 떨어질게 뻔한 곳만 눈에 들어왔다. 그때 어릴적 보았던 "젊은이의 양지"라는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외국인과 큰 계약을 성사하는 모습을 보며 엄마에게 나 저렇게 되고 싶다라는 말을 했던게 떠올랐다.
'아차, 혹시 외국에서 일하려면 어디를 가면되지?' 그러다 점수가 대략 맞는 곳이 눈에 들어왔다. 베트남, 인도어, 이태리어, 아랍어 등등 생각지도 않던 외국어과가 있는 대학이었다.
고민 고민하다 명문대에 입학한 친구에게 붙을만한 몇개 과를 얘기하며 물어봤다.
"인도가 인구도 많고 하니 인도어과가 좋지 않을까?"
친구의 지나가던 답변에 정말 아무 생각없이 복권을 사는거 처럼 인도어과 지원서를에 냈다. 나의 미래를 이렇게 결정하다니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지만 고민하는 것도 싫었다.
고등학교 졸업식에는 가지 않았다. 기대에 못 미친 대입 결과에 자존심도 상했고, 즐길 기분도 나지 않았다. 졸업식날 폴더폰으로 나를 찾는 친구들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아버지 일을 돕는다고 차를 타고 아무말 없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멀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고 세상 끝난거 처럼 행동했을까 한다. 아직도 어리고 어린 학생이었는데.
곧이어 지원한 대학교에서 합격했다고 연락이 왔고, 어릴적 친한 친구를 만나 대학교 얘기를 했더니 갸우뚱 하면 물어봤다.
"인도어과에 간다고? 그런 곳이 있어?" 무념무상으로 결정 했지만 오랜 친구가 이렇게 얘기하니 더 정이 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가서 편입이나 전과해야겠어라고 다짐했다.
인도와의 인연은 내키지 않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