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가울 Jun 20. 2023

휴직이라는 쉼표, 그 그늘에서

가을과 겨울 사이 내가 결심한 건

하지만 내겐 현실을 똑바로 쳐다볼 당돌함도, 적극적으로 분석할 의지도 부족했다. 내가 가진 자신감은 호 하고 불면 꺼져버릴 불씨 정도에 불과했다. 삶의 기한이 언제든지 마감돼도 이상하지 않으리만큼 존재의 크기가 희미했던 때였다. 당연히 그 대상이 남긴 글은 그럴 자격을 받아도 마땅했다. 형편없다고 평가하는 그들의 이유에 합당하지 않은 건 없었다




이대로 집에만 있을 수 없었다. 책상에 앉아 있는 걸 제외하곤 대부분의 시간은 누워 있는 채로 흘러갔다. 하루의 시작과 끝은 침대에서 이뤄졌다. 더 이상 무기력해질 기운마저 사라지기 전에 침대에서 일어나야 했다. 모로 누워서 핸드폰 화면 따윌 계속 보다가는 핸드폰을 충전할 때만 몸을 움직일 판이었다. 의식적으로 상체를 세웠다. 잃어버렸던 온몸의 감각이 되살아난 느낌이 들었다. 저렸던 어깨를 뒤로 젖히고 기지개를 켰다. 두 발을 움직여 집 밖을 나섰다. 몸이 자꾸만 무거워진 탓인가, 중심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바삐 앞으로만 갔던 두 다리가 멈춰 섰다. 봄에 보았던 벚나무 대신 단풍나무들이 그 공간을 채운 것이 마냥 기특해 멀찍이 서서 한동안 바라보았다.


두 달간의 병가는 끝이 났다. 10월 7일 자로 휴직이 시작된 후, 나의 행동반경은 집 앞에서 지하철역까지 이어진 산책로까지였다. 출퇴근할 때마다 매번 지나가던 길이였다. 직장인일 때는 갈 엄두도 안 났던 평일 오후에 산책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곳에는 형형색색의 나무들의 행렬이 있었으며, 삼삼오오 모인 어르신들의 목소리로 가득 차있었다. 어르신들 옆에는 요구르트를 판매하는 차가 종종 지나갔다. 엄마와 동행한 아이나 어르신이 아이스크림이나 요플레를 사는 광경을 제법 볼 수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땅 아래 길고양이가 그루밍을 하는가 하면, 새떼들이 몰려와 한바탕 지저대곤 했다. 나는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참새와 제비들을 본 적이 없었다. 오랜만에 불필요한 소음이 아닌 자연의 소리를 귓가에 온전히 담아갔다.


소설 창작 수업이 한 두차례 남았다는 걸 자각했을 땐, 또 다른 꿈이 생긴 상태였다. 2022년이 가기 전, 신춘문예에 응모할 작품을 완성하는 일이었다. 즉, 오래전부터 갈망해 온 작가의 삶을 손에 거머쥘 절호의 시기였다. 불현듯 필명을 만들어야겠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필명을 짓는 건 의외로 간단했다. 시기상 가을과 겨울사이라는 점에서 나의 필명은 가을의 '가', 겨울의 '울'을 따서 '가울'로 정해졌다. 다음 순서는 마지막 수업에서 9쪽짜리 단편 소설을 합평받아, 퇴고 작업을 반복하면 될 터였다.


내 차례가 되었다. 합평 순서는 4번째였다. 수업 첫날 무작위로 추첨되어 뽑힌 숫자였다. 수강생들이 한 명씩 돌아가며, 내가 쓴 글에 대한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긴장된 입가와 경직된 몸짓이 노트북 화면을 뚫고 나올까 봐 간신히 숨을 고르던 찰나였다. 잠잠했던 차도 위에 예상치 못한 경적음이 연이어 울리듯 수강생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소설을 이번에 처음 써보신 건가요? 글에 힘이 너무 들어가 있어서요.


곧이어 담당 선생님의 목소리도 연달아 들려왔다.


풋풋한 느낌을 주려고 하는 건 알겠는데, 간혹 가다 말투가 너무 느끼해지네요.
그리고 이 글의 배경이 되는 '마라톤'에 대해 공부하고 나서
장면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좋겠어요.
 
실제로 마라톤하는 사람을 인터뷰한다던가.



그 정도의 평가를 받을 거라곤 이미 직감했었다. 소설을 쓴다는 건, 현실 상황을 꽤나 정확하게 직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겐 현실을 똑바로 쳐다볼 당돌함도, 적극적으로 분석할 의지도 부족했다. 내가 가진 자신감은 호 하고 불면 꺼져버릴 불씨 정도에 불과했다. 삶의 기한이 언제든지 마감돼도 이상하지 않으리만큼 존재의 크기가 희미했던 때였다. 당연히 그 대상이 남긴 글은 그럴 자격을 받아도 마땅했다. 형편없다고 평가하는 그들의 이유에 합당하지 않은 건 없었다.

화면 속 사람들이 사라지자, 맥이 풀어졌다. 이마에 맺혔던 땀을 닦고 합평이 적힌 종이를 보니 어느덧 22시가 훌쩍 넘어섰다. 비로소 깨달았다. 무언중에 알아챘다. 어쩌면 내게 작가라는 자리는 과분한 것이라는 걸. 생각보다 나의 의지는 그리 강하지만은 않았다. 상처받기 전에 도망가버리는 길고양이에 불과했다.


그 무렵 나는 불쑥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앞으로 살아갈 궁리를 모색하겠다는 표면적인 구실 뒤에는 마냥 놀고 싶다는 뜻이 숨겨있었다. 합평을 받은 날로부터 3일 뒤,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의도했건 안 했건 제주도에서의 한 달 살이는 글에서 도피하기 위한 일종의 피신처 성향이 짙은 여행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우연히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이전 06화 공무원증 말고 한 편의 소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