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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가울 Jun 21. 2023

시작은 도피성 여행이었지만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버스는 교통 신호를 지켜가며 섰다 달렸다를 반복했다.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만 그대로였다. 인생에서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가질 확률은 얼마나 될까. 또다시 혼자 생각에 잠기는 것이 싫어, 다른 동행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때였다. 하차할 정류장에 다다를 때였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뒤를 흘끗 보았을 때 주목을 끈 건 다름 아닌 옆에 앉아 있던 승객이었다.




10월 말 애월에서 보낸 일주일은 음울하면서도 달콤했다. 제주도의 바람은 두 볼을 슬그머니 간지럽힐 만큼 적당히 불어왔다. 글을 쓰지 않으려고 이곳에 왔지만, 여전히 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둘째 날이었다. 노트북 화면을 주시하며 글을 쓰던 중 숙소 창문에 비친 바다색에 시선이 갔다. 너무나도 푸르러 멍하니 숨죽여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창문에 담긴 한담 해변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하기 짝이 없었다. 그 순간, 밖에 나가야 한다는 계시를 받았던 모양이다. 즉시 노트북을 닫고 숙소 밖을 나갔다. 오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혼자 남겨졌단 사실에 우울해했던 사람의 행동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두어 시간이 지나버렸다. 두 발바닥이 욱신거렸다. 물집이 잡힌 것 마냥 걸을 때마다 발가락에 무언가가 느껴졌다. 발길 따라 앞만 보며 걷다 보니, 낯선 곳까지 와버렸다. 목적지 없이 방황하다가 떠도는 삶을 간접체험한 기분이 들었다. 작가의 길을 꿈꾸다, 잠시 멈춰 섰다. 돌연 글이 좋아 어떻게든 글로 기록하려는 현재의 모습과도 같았다. 추운 겨울날도 아닌데 붕어빵이 그리워지는 날, 글은 내게 그런 의미였다.


애월에서의 생활이 끝나갈 때쯤, 나의 글도 거의 완성되어 갈 때였다. 거센 물결이 넘실대던 10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신춘문예 대신 차선으로 선택한 공모전에 제출할 글이었다. 억세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정도로 휘몰아치는 파도의 물결은 심히 성나보였다. 신진작가 지원육성사업에 지원할 시놉시스가 담당자 메일로 발송되었다. 물결의 거센소리를 들으며 눈을 지그시 감아보았다. 작가가 되기 위한 이상이 현실 앞에 어렴풋이 보이는 성싶었다. 그렇게 10월은 파도에 의해 흘러 지나갔다.


좁은 길 사이로 '안녕하세요'라는 다섯 글자가 연신 울리던 어느 날이었다. 제주도에 온 지 2주 만이었다. 처음으로 말 상대가 생겼다. 말할 상대가 곁에 있다는 건 포장된 선물을 조심스레 뜯어보는 일과 같이 설레는 일이었다. 좁디좁은 안돌오름의 길을 따라 행렬을 지으며 올라갔다. 초면인 사람들과 동행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마음은 고요하면서도 편안했다. 이윽고 정상에 올라섰다. 두 눈을 지그시 감아 보았다. 혼자였으면 못 느꼈을 몽글거림이 그곳에 있었다. 답답하게 묵혀놨던 체증이 한 번에 내려간 기분이었다. 

그들과의 만남은 우연히 만난 거치곤, 겹치는 것이 많았다. 신기하게도 소품샵을 좋아하는 취향이 통했다. 똑같은 운동화를 신은 데다 심지어 발 사이즈마저 같았던 다른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관계의 시작점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1주가량 머물렀던 숙소 주변이 제2의 고향처럼 느껴지는 친숙한 감정과 대등했다. 서로의 성향을 간파하는 건 단 하루면 충분했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따분해질 때쯤, 공허함은 예고 없이 찾아오곤 했다. 구좌로 넘어온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11월도 어느새 반이 지나갔다. 그사이 비가 내린 날은 채 하루도 되지 않았다. 비가 오지 않아 걱정이라는 택시 기사님의 근심 어린 목소리가 떠올랐다. 근심해 봤자 달라질 건 없었다. 혼자 있다는 사실에 우울해질 필요 또한 없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버스 안에선 똑같은 공익광고가 재생되었다. 크게 변할 건 없었다. 내가 서 있는 공간만 달라졌을 뿐, 내면적인 외로움은 그 누구도 채워주지 못했다.


버스는 교통 신호를 지켜가며 섰다 달렸다를 반복했다.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만 그대로였다. 인생에서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가질 확률은 얼마나 될까. 또다시 혼자 생각에 잠기는 것이 싫어, 다른 동행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때였다. 하차할 정류장에 다다를 때였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뒤를 흘끗 보았을 때 주목을 끈 건 다름 아닌 옆에 앉아 있던 승객이었다. 우리는 같은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다. 유리공방 문을 여는 순간, 뒤따라온 여자분과 눈이 마주쳤다. 필연이 아닌 것치곤 타이밍이 적절했다. 무려 1시간 동안 같은 버스에서, 동선이 겹친다는 건 높은 확률로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오늘 만날 동행 중 한 명과의 만남은 예상보다 일찍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OO님에서 언니로 호칭이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밤은 비와 함께한 날이었다.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가 싶더니 그새 주룩주룩 그 세기를 더해갔다. 빗소리를 들으며 쥐포를 안주 삼아 꿀주를 마시던 그때, 인생은 그리 달달하지만은 않다는 걸 직감했다. 비에 젖지 않으려고 우산을 써도 큰 효과는 없었다. 옷의 색은 빗물과 만나 짙어만 갔다. 예상은 했었다. 3단 접이식 우산으로 무지막지하게 오는 비를 막기엔 무리였다. 그날 밤 아쉽게도 신진작가 지원 대상에 떨어졌다는 메일을 받았다. 생각 외로 무덤덤했다. 캐리어에 짐을 싸고 침대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나는 글에 대한 미련은 다 사라진 줄 알았었다.


지난 한 달 동안의 여정이 눈앞에 펼쳐졌다. 여행을 통해 소중한 인연이 생겼다. 그리고 끝난 줄만 알았던 글에 대한 단상은 밤새 내리는 비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모든 짐을 싸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소설이 아니더라도 다른 형태의 글을 써야만 하는 욕구가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새롭게 알게 된 사람들을 계속 만나더라도, 나는 글로 위로를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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