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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가울 Jun 17. 2023

최선을 다해 도망쳤다. 나의 보건소로부터

그저 내 인생을 살고 싶었을 뿐이다

신경이 곤두서졌다. 일정량의 호흡을 내뱉자 이내 평온해졌다. 주변 잡음도 서서히 들리지 않았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어느 때보다도 자유로워졌다. 자유로워졌다는 건 마음만 먹으면 캔버스에 색칠했던 그림을 지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곤 깨끗해진 캔버스를 쳐다보며 종이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슬퍼하면 그만이었다. 이 모든 일의 근원이 나라는 사실을 부각하지 않으려면 그 정도의 슬픔은 감당해야 했다.   





2022년 8월 5일 금요일, 마지막 출근일이었다. 반찬을 집느라 젓가락끼리 부딪히는 소리를 제외하곤, 팀원들과의 마지막 식사 자리는 유달리 고요했다. 너무나도 조용한 나머지, 애꿎은 밥만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평소 식성대로라면 손이 자꾸만 갔을 미역국은 먹는 시늉만 했을 뿐, 내용물은 그대로였다.


팀장님께 곧 병가를 낸다고 통보한 건 이주 전이었다. 직원이 새로 발령되는 시기는 8월 중순 이후였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이번만이었다. 나를 위해 이기적으로 생각하는 건 딱 한 번 뿐이었다. 8월 초까지 출근하겠다는 의사를 표하는 데까지는 스스로를 다그치는 수많은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을 그나마 단축시키게 한 건, 팀장님 표정 뒤에 감춰진 속내를 알고 난 뒤부터였다.


한 달에 한 번 이상 연가를 내는 목적이 병원에 가기 위한 것이란 걸 팀장님은 모를 리 없었다. 당일날 아파서 갑자기 조퇴하거나 어지러운 걸 주체하지 못하고 엎드려 있을 때도, 그저 팀장님의 눈에는 '책임감 없는 요즘 애들'로 비쳤다. 그 정도 시선쯤은 감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 휴직 전 병가를 내는 절차를 알려준 직원에게 핀잔을 줬다는 사실을 건너 들었을 땐 보이지 않는 압박 속에 갇힌 것만 같았다. 가슴이 미어터지다 못해 먹먹해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위를 무한정 헤엄치는 기분이 들었다. 바닷속은 얼음장처럼 차가워 가만히 버티기엔 어려웠다. 결국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다시 공직에 들어가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개인 짐으로 가득 차버린 책상을 원래 상태로 치우면서, 유에서 무의 상태로 가고 싶었다. 절실했던 마음은 현실이 되었고, 팀원들의 마지막 배웅을 뒤로한 채 보건소를 떠났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바라본 보건소 건물은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거리감이 꽤나 느껴졌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하는 퇴근길은 이제 마지막이었다. 밤늦게 집에 도착해야 한다는 명분은 더 이상 없었다.


어느 때와 똑같이 침대에 누워 천장을 유심히 바라봤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벽지색이 하얗게 보였다. 두 눈을 지그시 감아보았다. 두 팔을 위로 들어 만세를 하는 시늉을 했다. 신경이 곤두서졌다. 일정량의 호흡을 내뱉자 이내 평온해졌다. 주변 잡음도 서서히 들리지 않았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어느 때보다도 자유로워졌다. 자유로워졌다는 건 마음만 먹으면 캔버스에 색칠했던 그림을 지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곤 깨끗해진 캔버스를 쳐다보며 종이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슬퍼하면 그만이었다. 이 모든 일의 근원이 나라는 사실을 부각하지 않으려면 그 정도의 슬픔은 감당해야 했다.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났다. 벅찬 감정이 물밀듯 넘실대는 어느 오후였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귀걸이 한쪽이 우연히 발견될 때 나오던 표정이 떠올랐다. 뜨거운 공기가 창문 사이를 비집고 내부로 들어왔다. 한여름에도 전기세 걱정을 하며 선풍기에 의존한 채 더위를 날려야 했었다. 따가운 햇볕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멈춘 곳은 다름 아닌 책장이었다.


책장에는 '바깥은 여름', '여름의 빌라' 등 소설책들이 빼곡하게 채워졌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꿈들이 슬그머니 생각날 무렵, 그날 밤 나는 초보를 위한 소설 창작 강의를 수강신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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