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속에 고인 울분을 게워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저 삶은 고단했고, 유달리 고된 하루였다.'로 끝나는 문장이라기보단
'몸이 고단한데, 업무까지 밀려 고되고 괴롭다. 문득 술 한 잔이 무척이나 고프고 그리웠다.'로 연장되는 문장에 더 어울리는 단어였다.
말 그대로 민원의 연속인 연장선상에서 아슬하게 외줄 타기하며 고꾸라지진 않을까 걱정하는 그런 류의 인생이었다. 무척이나 고달팠다. 의약과에서 근무하는 내내 내가 느꼈던 전반적인 감정 상태였다.
영문도 모른 채 처음 보는 직원들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답신으로 박수소리가 짤막하게 들려왔다. 안 그래도 떨리는 어깨를 진정시킬 겸 고개를 드는 순간, 나의 두 눈은 심히 떨리기 시작했다. 눈앞에는 꿈속에서 봤던 낯익은 장면이 뿌옇게 재연되었다.
의약과 의무팀에 들어간 지 이 주일째. 2022년 1월도 어느새 반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그 무렵 나는 매일 동일한 꿈을 꿨다. 잠에서 깨어난 직후 못 볼 걸 봤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황급히 일어났다. 알람이 울리기 전 시계를 확인하는 버릇 때문에, 신경은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출근 준비를 하면서도 거울 속 내 얼굴이 낯설어 고개를 돌릴 때면, 꿈속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잊으려고 다른 생각에 잠기다 보면 어느샌가 보건소에 도착해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일상처럼 하는 건 아침 대용으로 삶은 계란을 먹는 것이었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식후 약을 복용하는 것이었다.
감염병 대응팀에서 의무팀으로 소속이 바꿨지만,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자리만 옮겨졌을 뿐, 업무는 역시나 고단했다. 고단하다는 건 비단 춥고 배고픈 상황에서만 국한되는 단어가 아니었다. 항상 화에 가득 찬 사람과, 울먹이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도 사용할 수 있었다. 심지어 동종업계를 공격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민원인을 상대할 때도 쓰이는 만능의 단어였다.
'그저 삶은 고단했고, 유달리 고된 하루였다.'로 끝나는 문장이라기보단
'몸이 고단한데, 업무까지 밀려 고되고 괴롭다. 문득 술 한 잔이 무척이나 고프고 그리웠다.'로 연장되는 문장에 더 어울리는 말이었다.
말 그대로 민원의 연속인 연장선상에서 아슬하게 외줄 타기하며 고꾸라지진 않을까 걱정하는 그런 류의 인생이었다. 무척이나 고달팠다. 의약과에서 근무하는 내내 내가 느꼈던 전반적인 감정 상태였다.
하루에도 몇십 건씩 접수되는 의료기관 민원에 답변을 보낼 때마다 그 자리를 탐내듯 새로운 민원이 꿰차고 들어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병원을 개설할 거니, 빨리 승인해 달라고 담당자가 직접 방문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무작위로 예고 없이 찾아와 하소연하는 민원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단 하루도, 숨 한번 제대로 쉬기 어려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나는 심히 지쳐있었다. 그들의 입에서 무수히 많은 말이 쏟아져 나왔다. 의료법을 개선해 달라는 그들의 요구에 나는 더 이상 동조를 할 수 없었다. 어떠한 위로의 말도 쉽게 나오지 않았다. 무의식 속 자아가 의식의 흐름을 끊어놓고 나 몰라라 하고 도망가버리는 꼴이었다. 가뜩이나 없던 생기마저 점점 나빠지는 시력만큼 몸속에서 빠져나갔다.
의약과에서 가서도 감염병 대응팀의 업무의 끈은 싹둑 잘라지지 않았다.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여 보건소 전체 직원이 역학조사를 해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주말 근무에도 당연히 동원되었다. 코로나19 역학조사 업무와는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없는 질기고 질긴 관계였다.
몇 개월 뒤, 코로나19가 잠잠해져 갈 무렵이었다. 이제야 본업에 집중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드는 것도 잠시, 불청객이 찾아왔다.
모니터 화면에는 낯선 문서들로 가득해졌다. '한의약', '웰다잉', '기간제근로자 채용'의 제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몇 년간 중단되었던 사업을 재개하라는 소장님의 지시 이후, 그제야 업무분장 상 내 이름 옆에 적힌 사업이 무려 3개나 있었다는 사실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 무렵 책상에 놓인 메니에르 약 종류는 2개에서 3개로 늘어나 있었다. 정규 근무시간에는 민원을 처리하고 출장을 가느라, 18시 이후 본 업무를 시작하는 것에 익숙해졌을 때였다. 여전히 똑같은 꿈에서 깨어나 출근하는 아침은 변함없이 유지되는 반면, 퇴근 시간은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규칙해져 갔다. 서랍 속에 장기간 보관해 뒀다 꺼내보니 작동이 멈춘 시계처럼, 몸과 마음은 한순간에 쇠약해졌다.
매일 밤 거의 울다가 지쳐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그럴수록 두 사람 이상의 몫을 일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업무분장을 조정해 달라는 의견을 제시할 때마다 다른 얘기로 돌리고 마는 팀장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몸속에 고인 울분을 게워내기엔 역부족이었다.
6월이 거의 다 지날 때까지도 그 꿈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현실에 머물고 싶었지만, 손 쓸 방도가 없었다. 삶에 대한 욕구는 결국 6월 마지막 날, 한 정신의학과 의원에 발을 내딛게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달 후, '중등도의 우울장애', '상세불명의 불안장애'라는 병명과 함께 3개월 간 안정가료가 필요하다는 진단서를 받았다.
왜 그동안 힘들다고 말 안 했어?
진단서를 들고 팀장님께 병가를 내겠다고 말했을 때 돌아온 대답이었다. 그 순간 한 장면이 머릿속을 탁 하고 지나갔다.
지난 몇 개월간 꿈에서 보고 놀랐던 물체의 실루엣이 선명하게 보이자, 가슴이 철렁 내려갔다. 그 존재는 다름 아닌, 나였다. 차도에 쓰러져 미동조차 없던 의식불명의 나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