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주어진 세 개의 이름
n번째 졸라덱스 주사 맞는 날.
하필 오늘 교직원 회의가 있어 조퇴를 하지 못했다.
항호르몬치료의 특성상 날짜를 꼭 맞춰서 맞아야 하는데, 오후가 되자 오늘 과연 주사를 맞을 수 있을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회의에 들어가기 전 친한 언니들에게 주사실 운영시간을 묻는 s.o.s를 쳤다. 그러자 얼마 전 주사를 맞고 온 환우 선배 언니가 주사실 운영 시간이 나온 사진을 sns로 바로 보내 주었다. 일반주사실은 오후 5시면 끝나지만 운영이 끝나면 항암낮병동을 이용하라는 안내 문구와 함께 항암낮병동은 저녁 9시까지라는 문구가 보였다.
'후, 다행이다. 저녁 9시까지 라니 안심이야!'
낮병동에서 주사를 맞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회의에 들어갔다. 회의가 일찍 끝났으면 하는 나의 바람과는 달리 회의는 길어졌고, 아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 비가 오는데 나 우산이 없어. 나 학원까지 어떻게 가야 해?"
'아뿔싸. 비라니.'
전화를 받으며 회의장을 빠져나와 창문밖을 내다보니 비가 제법 내리고 있었다. 아이는 오늘 처음으로 학원 셔틀버스에서 혼자 내려서 또 다른 학원까지 혼자 걸어가 보기로 하였는데 하필 비가 내리고, 우산까지 없었다. 울먹이는 아이를 위로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아이를 어르고 달래서 모자를 쓰고 학원까지 뛰어가게 하는 수밖에.
"소은아, 모자 쓰고 얼른 뛰어가!"
"엄마, 뛰어가면 넘어지잖아. 뛰어가면 안 돼."
"그래, 소은이 말이 맞아. 얼른 천천히 걸어 가."
얼른 천천히 가라니. 내가 봐도 말이 안 되었지만 초조하고 다급한 나의 마음을 숨길수가 없었다. 아이가 빨리 안전하게 학원에 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평소보다 늦은 퇴근길에 갑자기 비까지 내리면서 도로는 엉망이 되었고, 나는 꽉 막힌 도로 위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과연 이렇게 주사를 맞으러 가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일이라고, 또 그다음 날이라고 해서 상황이 달라질 것은 없었다. 내가 오늘 병원을 안 가면 내일 아이는 또 혼자 남겨질 것이고,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렇게 빗길을 뚫고 겨우 병원에 도착한 나는 어둠이 내려앉은 병원의 야경을 바라보며 항암낮병동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졸라덱스 맞으러 왔는데요."
간호사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졸라덱스는 맞으시려면 6시까지 오셔야 해요. 지금은 시간이 늦어서 못 맞으세요. 약제실이 끝나서 저희도 주사약이 없어요."
이 무슨 날벼락같은 소리인가. 약이 없다고? 머리가 아득해졌지만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갈 수는 없었다.
"선생님, 저 오늘 주사 맞으려고 멀리서 여기까지 왔어요. 저 오늘 꼭 주사 맞아야 해요. 방법이 없을까요? 여기 안내문에 오후 9시라고 오면 된다고 적혀 있잖아요."
그러면서 주사실 운영 오후 9시까지라고 적힌 안내판 사진을 내밀었다. 간절한 마음이 통했을까. 간호사 선생님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주사약을 구해주셨고 다음에는 꼭 항암낮병동에도 5시 40분까지는 와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셨다.
"네, 그렇게 할게요. 정말 감사해요!"
주사는 오늘따라 더욱 아팠지만, 오늘 주사를 맞고 갈 수 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머피의 법칙이라고 할 만큼 운이 나쁜 날이었지만, 또 달리 생각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사를 맞게 되었으니 감사한 날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아이를 만나 힘껏 칭찬을 해주었다.
"우리 소은이, 오늘 정말 씩씩하게 잘했어! 빗길에 우산도 없어서 힘들었을 텐데 학원까지 혼자서 잘 가다니 정말 대단해! 혼자 가보니까 어땠어?"
"너무 서운했어. 다른 애들은 다 엄마가 와서 우산도 씌워주고, 웅덩이에서 엄마랑 첨벙첨벙도 하는데 나만 혼자였어."
영화나 드라마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맞벌이 가정의 레퍼토리. 그 일이 우리 가족에게도 직접 일어나다니 씁쓸했지만 어쩌랴.
"그랬구나, 우리 소은이 엄마가 없어서 너무 서운했겠다. 엄마가 데리러 못 와서 미안해."
나는 아이를 꼭 끌어안으며 토닥토닥해주었다.
"그래도 소은아, 소은이가 야무지게 비도 잘 피해서 옷도 많이 안 젖었다며? 학원 선생님이 소은이 오늘 혼자서도 잘 왔다고 칭찬해 주셨어."
"맞아. 엄마, 나 잘했지?"
"그럼, 잘했지!"
나는 비록 속이 상했지만 아이를 향해 미소 지었다. 이렇게 아이도, 엄마도 성장해 가는 거겠지.
직장을 다니며 치료를 받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1분 1초를 아이 스케줄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워킹맘은 더더욱!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혼자서 자신의 몫을 잘 해내준 아이에게 고맙고, 오늘도 수고한 나 자신에게 고맙다. 앞으로 주사가 몇 번이나 더 남았을지 모르겠지만 3개월 후 주사를 맞는 날에는 따뜻한 봄이 찾아와 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분주하고 바쁜 일상을 살고 있겠지만 그때는 소은이도 나도 지금보다 한 뼘 더 자라 있겠지. 그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살아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