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한 지 9일째 된 날. 드디어 배액관을 제거했다. 배액관이란 수술 부위에 관을 달아 피가 바깥으로 빠져나올 수 있게 만든 것인데 배액관 끝에 피주머니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혹시라도 배액관이 빠지면 응급실에 가야 했기에 배액관을 달고 있는 동안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오늘 진료는 배액관을 제거하고 수술 부위를 소독하는 간단한 진료였기에 주치의 교수님이 아닌 다른 의사로 예약이 잡혀 있었다. 진료실에 들어가자 20대로 보이는 젊은 의사가 보였다. 진료 전 병원 홈페이지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보았다. 레지던트 후 전문의 시험에 합격한 임상강사였다. '나에게도 이런 젊은 시절이 있었지.' 그를 보자 순간 나의 젊은 시절이 떠올랐다. 결혼 전에는, 아이를 낳기 전에는, 이렇게 30대 이른 나이에 환자가 되어 배액관을 달고 다닐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피가 많이 나올 경우 배액관을 뺄 수 없어서 날마다 피주머니를 비우며 배액량을 기록하는데 나의 경우 그 양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오늘 못 빼면 어쩌나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배액관 빼는 건가요?"
배액량 기록지를 건네며 겁먹은 목소리로 의사에게 물었다.
"빼지 말까요?"
의사는 짓궂은 농담으로 나를 당황케 했다. 대학병원 의사도 농담을 할 줄 아는구나. 주치의는 늘 바빠서 몇 마디 나눌 수도 없었는데, 그제야 의사도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어제부터 겨드랑이가 더 아프다는 나의 질문에도 상세히 답변을 해주었다.
"우리는 그걸 기절했다고 표현하는데, 세포들이 잠시 기절했다가 회복되면서 감각이 돌아오는 거예요. 근데 가슴보다 겨드랑이 신경이 더 예민해서 수술한 부위보다 오히려 더 통증이 느껴질 거예요."
팔이 안 올라간다고 하니 그래도 운동을 해야 한다면서 당겨도 운동을 해야 한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팔이 당기는 건 수술한 부위가 당기는 게 아니라 그 안에 근육이 당기는 거예요. 그러니 근육이 굳지 않게 팔을 쭉 펴는 연습을 해야 해요."
"수술이 잘 되었나요? 저는 수술 부위를 못 봐서요."라는 나의 질문에는 "잘 되었다. 모양도 예쁘다."라고 안심도 시켜주었다. 수술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그때까지도 두려운 마음에 수술 부위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의 질문에 꼬박꼬박 답해주는 그가 고마워서 슬그머니 용기가 났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질문들을 탁구공 던지듯 계속 던졌다.
"영양제를 먹어도 되나요? 주변에서 추천을 해줘서요"
주변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약사였다. 의사는 그런 사람과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말했다.학회 논문에서 검증된 건 비타민 D 뿐이니, 꼭 먹으려거든 비타민 D만 챙겨 먹으란다. 그것도 금요일에 교수님이 처방해주실 거라는 말과 함께. 그런데도 내가 계속 영양제 타령을 하니(비타민 C의 고용량 요법에 대한 질문)그의 입에서 거친 말이 나왔다.
"개소리하지 말라 그래요. 사람 몸 가지고 그렇게 하면 안 돼요."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 개소리란 말에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았다. 이 패기 넘치는 젊은 의사는 환자를 무시해서가 아니라진심으로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고 조언을 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식단에 대해 물어보니 이번엔 또 먹고 싶은 것을 다 먹으란다.
"밀가루와 탄수화물은 안되지 않나요?"
"그럼 이탈리아 사람들은 밀가루랑 빵이 주식인데 다 암에 걸리게요? 그냥 먹고 싶은 거 드세요. 회도 드셔도 돼요."
지난번 주치의 교수님도 식이요법을 묻는 내 질문에 이렇게 답했었지. 마지막으로 온열 요법을 물어보자
"이번엔 한의사가 그래요?"라며 웃는다. 그리고 내 눈을 꼭 바라보며. "절대! 절대 그런 거 하지 마세요. 진짜!"라고 힘주어 말하는데, 정말 해서는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버렸다.
아, 도대체 무얼 믿어야 하는 걸까.의사는 진심으로 영양제를 먹지 말라 조언하고 약사는 그 약이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추천한다. 의사는 먹고 싶은 것을 모두 잘 먹으라고 하는데 인터넷에서는 절대 그렇게 먹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의사는 온열요법을 절대 하지 말라며 간곡히 말하는데 바깥세상에서는 내 몸의 온도를 1도 올리면 암을 치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도대체 환자는 누구의 말을 신뢰해야 하는 것일까. 내 생명을 담보로 어떤 이를 믿어야 할지 결정하는 일은 정말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건 다른 것도 아니고 사람의 목숨이라고!
암에 걸리고 나서 가장 나를 힘들게 한 현실은 대학병원의 표준치료와 요양병원의 면역치료가 서로 상충한다는 것이었다. 대학병원에서는 의사가 처방한 것 외에 그 어느 것도 허용하지 않지만 면역치료를 하는 사람들은 대학병원의 의사 말만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어떤 이는 현대의학에서 포기한 시한부 삶을 녹즙만 하루에 2리터씩 먹으며 병을 치유하고, 어떤 이는 요양병원에 입원하여 고용량의 비타민C와 면역주사들을 맞는다. 그리고 어떤 이는 하루에 20알이 넘는 영양보충제들을 복용하며 암을 치료한다.
나는 갈림길에 섰다.
전적으로 주치의를 믿고, 표준치료에 의존할 것인지. 아니면 내 방식대로 나만의 치유 청사진을 만들 것인지. 그 고민을 하느라 하루하루가 힘든 나날이었다. 암 환자는 아픈 것만도 서러운데 왜 정확한 치료법이 없는 것인지, 현대 의학이 왜 그걸 밝혀내지 못하는지 답답해서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진료실을 나오며 얼마 전 지인이 보내준 커피 쿠폰이 떠올랐다. 이름하여 '힘내라 힘 세트' 누가 지었는지 이름 한 번 기가 막히게 잘 지었다는 생각을 하며 병원 안에 있는 카페를 방문했다. 힘을 나게 하는 달달한 과일 주스 두 병과 이름부터 부드러운 '부드러운 카스텔라'세트였다. 나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빵을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오늘로 진단받은 지 27일째. 진단받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내가 좋아하는 빵을 끊는 것이었는데. 마음이 흔들렸다. 열심히 고민하고 내가 내린 결론
"한 입만 먹을게."
그렇게 나는 부드러운 카스텔라 한 입을 베어 물고, 마스크를 다시 썼다. 나머지는 남편의 몫. 한 입 베어 먹은 카스텔라의 맛은 달콤하고 부드러웠지만 기절할 만큼 맛있지는 않았다. 먹고 나니, 먹고 싶다는 간절함이 해소되었다. 그저 한 입 먹었을 뿐인데.
그래, 뭐든 내 마음이 편한 게 최고지!
영양제든, 자연치료요법이든, 확실한 건 없지만 가장 확실한 건 스트레스받지 않고 내 마음이 불안하지 않고 평안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