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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진경 Apr 05. 2022

내가 나중에 엄마가 할머니 되면 돌봐줄게.

엄마는 정말 하늘나라 안 갈 거지?

S: 엄마, 할머니들은 왜 허리를 이렇게~ 숙이고 구부정하고 다녀요?

M: 나이가 들면 허리가 아프셔서 그래.

S: 꽃처럼? 꽃이 시드는 거랑 똑같아요.


 어느 날, 아이와 함께 길을 걷는데 반대편에 허리를 반쯤 구부린 꼬부랑 할머니가 보였다.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걷고 계셨는데 소은이는 할머니의 구부러진 허리를 보고, 시들어서 고개가 떨어진 꽃을 떠올린 것이다. 특별히 가르쳐 준 적이 없건만, 대상을 비유하는 능력을 가진 걸 보고 역시, 아이는 어른보다 훌륭한 시인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S: 엄마, 할머니들은 왜 머리가 하얗고 손도 주글쭈글해요?

M: 나이가 많이 들면 머리카락이 하얘지고, 피부도 늙으면 그렇게 되는 거야.

S: 왜 나이가 들면 머리카락이 하얘져요?

M: 우리 머리카락에는 머리를 검게 만드는 세포가 있는데 나이가 들면 이 세포가 없어져서 흰머리가 생기게 된대.

S: 엄마도 나중에 그렇게 돼?

M: 응 그렇지.

S: 그럼 내가 나중에 엄마가 할머니 되면 돌봐줄게.

M: 정말? 알았어. 그럼 소은이가 엄마 할머니 되면 돌봐줘야 해.

S: 아기처럼?

M: 응, 아기처럼.


 다섯 살 아이가 벌써 나를 봉양할 생각을 하다니, 기특하고 대단하군. 나는 흐뭇하기도 하고, 마음이 찡하기도 하고, 어른이 된 소은이와 할머니가 된 나를 상상하며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빨리 시간이 흘러 소은이가 예쁜 아가씨가 된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오래 살아서 소은이가 말한 대로 소은이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야지.


 사람은 나이가 들면 몸도 마음도 다시 아기로 돌아간다는데, 소은이가 벌써 그 진리를 알고 있다니 한편으로 놀랍기도 했다. 때론 다섯 살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속이 꽉 찬 아이. 외할머니는 가끔 이런 소은이를 보며 '어려 보여도 속이 다 있다. 애어른이다.'라는 말을 하시곤 했다.  


S: 엄마 그런데 백설공주는 엄마가 하늘나라 갔잖아. 엄마는 정말 하늘나라 안 갈 거지?


 소은이의 영특함에 감탄하고 있는 찰나에 소은이가 허를 찌르는 질문을 던졌다. 아프고 나서, 내가 가장 걱정했던 부분. 항상 소은이 입에서 나올까 봐 조마조마했던 말이 앙증맞은 입에서 갑자기 튀어나왔다. 유방암을 진단받고 수술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아이는 내가 아프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M: 그럼, 엄마는 절대 하늘나라 안 갈 거야. 소은이 옆에 딱 달라붙어있을 거야.

S: 나 키 클 때까지?

M: 아니, 키 크고 소은이가 엄마처럼 결혼해서 아이 낳고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옆에 있을 거야. 그러니까 절대 그런 걱정 하지 마.

S: 꼬부랑 할머니? 큭큭.


 나는 눈물이 나오려 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척 말을 이어나갔다. 다행히 소은이는 '꼬부랑'이라는 말이 우스웠는지 큭큭대느라 나의 표정 변화를 읽지 못했다. 왜 하필 백설공주는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신 거람. 디즈니 공주들이 엄마를 일찍 여읜 것이 늘 싫었다.


 그러나 디즈니 공주 중에서도 엄마, 아빠와 행복하게 사는 해피엔딩의 결말을 가진 공주가 있었는데 바로 라푼젤 공주가 그랬다. 그래서 나는 라푼젤 이야기가 좋았다. 라푼젤 공주는 어릴 때 마녀에게 납치당하지만, 어른이 되어 엄마, 아빠의 품으로 돌아가 행복하게 사는 걸로 끝이 난다. 소은이 역시 라푼젤을 가장 좋아했다. 라푼젤에 등장하는 마녀 고델은 라푼젤의 머리카락이 가지는 마법의 힘으로 젊음을 유지한다. 마법의 힘이 떨어지면 다시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피부도 쭈글쭈글해진다. 소은이가 부쩍 할머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아마 마녀 고델의 영향도 클 것이다. 고델을 보면 인간은 보편적인 욕망을 알 수 있다. 젊음을 유지하고 싶은 욕망, 영원히 늙지 않고 싶은 인간의 소망이 고델이라는 인물 속에 형상화되어 있다. 시곗바늘을 움직여 빨리 할머니가 되고 싶은 나와는 정반대의 인물.


 환우들과 얘기하다 보면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젊은 암환자라면 누구나 한 번씩 해봄직한 생각임을 알게 된다. 암환자라서 느끼는 동질감. 나이 들고 싶지 않고, 젊어 보이고 싶은 게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라면, 젊은 암환자는 나이 듦이 부럽고, 할머니가 될 때까지 제발 살아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특수한 감정이 생긴다. 나는 욕심 많은 인간이라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싶은 생각이 드는 날이 오긴 할까 싶냐만은, 그런 생각이 들 때까지 오래오래 살고 싶은 게 지금의 내 마음이다. 과연 몇 살이 되어야 그런 생각이 들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머리카락은 하얗고, 손은 쭈글쭈글한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도 좋으니, 사랑하는 딸 소은이와 사랑하는 남편 옆에서 예쁘게 늙어갔으면 좋겠다. 과연 소은이가 얼마나 나를 잘 돌봐줄는지, 그때 가서 오늘 내가 쓴 이 글을 읽으며 미소 지을 수 있었으면.


 

그림: 꼬부랑 할머니(권정생 글, 강우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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