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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질 Jul 20. 2021

가방.





며칠 전 오랜만에 서점에 들러 책을 한 권 샀다.

원래는 선물용이었지만, 어떤 얘기들이 있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줄 수는 없으니 2 단락 정도만 읽어보자. 하다가 푹 빠져 결국 다 읽어버렸다.



가방에 관해 쓴 단락이 있었는데, 꽤나 공감이 가는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나는 가방을 싫어하지만 항상 필요한 물건들과 새로 산 것들이 충분히 담길 수 있는 가방을 들고 다니는데,

그래서인지 항상 가방을 들지 않고 양손 가득 지갑이니, 립스틱 같은 것을 바리바리 들고 다니는 친구들의 짐을 대신 메고 다니곤 했다.


서점이 있던 골목



가방은 정말 싫다. 무거운 가방은 더더욱.

여름에는 나시티 위로 얇은 끈이 어깨를 짓눌러 자국이 나고, 겨드랑이 쪽에는  끈에 옷이 땀에 절어 쭈글쭈글해져 있다. 겨울에는 겹겹이 입은 옷에 가방이 자꾸 미끄러져 버스나 지하철에서 자리가 없어 손잡이를 잡고 서서   ‘툭’, 하고 무겁게 떨어지기도 한다.

한쪽 어깨가 기울어지거나 올라가 있는 느낌도 불편하고,

그렇다고 백팩을 메자니 등에 땀이 가득 차거나 어딘가 앉을 때마다 가방을 빼야 하는 건 더 싫다. 크로스로 멜 수 있는 작은 가방도 몇 번 사보긴 했지만, 내가 챙기고 싶은 물건들이 전부 들어가지 않아 실패.








어렸을 적 나는 멋진 커리어우먼이 되고 싶었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을 멋지게 척척 처리해나가고,

또각또각 스웨이드 재질의 멋진 구두를 신고

깨끗하고 비싸지만 무거운 가방 안에 서류를 가득 담고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바른 자세로 빠르게 또각또각.



20대 후반이 된 나는 그런 깨끗한 옷과 가방을 필요로 하는 직업도 가지지 않게 되었고, (오히려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린 옷이 더 맞는 그런 직업이다.) 입을 수 있는 기회도 적은 편에 속한다.

내 친구들은 대부분 캐주얼한 옷을 입는 편이라,

내가 갑자기 스카프가 달린 정장 재질의 등이 파진 긴 원피스를 입고 나타나거나, 앞코가 뾰족한 구두를 신거나 엄마의 명품가방을 메고 나오면

‘오늘 무슨 날이야? 데이트?’ 같은 질문을 받게 된다.

대답하기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다.

그런 질문들은 신경 쓰지 말고 네가 원하는 옷을 입어!

라고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 질문들을 견디는 것보다, 상황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은, 이 무리 속에 포함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단 말이지.


내 직업은 대체 뭘까


그래도 가끔씩 말끔하게 옷을 입고, 깨끗한 구두와 가방을 메고, 살짝 빠른 걸음으로 총총 길을 걷는다.

물론 업무 미팅 같은 약속은 없다.

머릿속으로 당당한 커리어 우먼을 상상하며 두근거리는 맘으로 도시의 무리 속에 속한 듯 사람들과 발걸음을 맞춰본다.








오늘은 어떤 크기의 물건이든지 척척 넣을 수 있는 거대한 똑딱이 동전지갑 형태의 가방을 메고 나왔다.

이 가방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똑딱이 부분이 툭, 하고 잘 열린다는 것인데, 무거운 물건을 넣을수록 더 그렇다.



예전에  가방을 메고 나왔던  전에 만나던 친구와 크게 싸웠었다. 만나기 시작한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점이었는데, 그날  친구는 하루 종일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었고, 속상한 마음에 괜히 말을 꺼냈다가 혹시  친구가 나를 싫어하게 될까 하는 걱정에 자꾸 열리는  가방에게 나는 화를 돌리고 있었다.  친구는 가방에게 화를 내는  모습에 실망했고, 나는 그날 결국 나의 서운함을 진실되게 토로하지 못했었다. 당연  친구와는 얼마 되지 않아 헤어졌다. 헤어지던   친구는 그날의 나를 다시 들추며 마구 비아냥 거렸다.



그 친구는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았기에 사귀는 동안 이것저것 내 삶의 방식에 대해 태클을 걸어왔는데, 나는 그저 어른의 충고구나 싶어 어리석어 보이는 나 자신을 마냥 깎아내리기만 했었지.

결국 마구 내리꽂는 그 친구의 말들에 완전히 질려버린 나는 이별을 고했다. 그때 그 친구의 말들은 그저 살면서 무언가를 이루어낸 누군가의 삐뚤어진 자부심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마치 우리 할머니가 본인의 과거의 노력의 업적을 꺼내 들며 나에게 선생님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처럼. 상대를 위하지 않았던 말들이었다.


좋아하는 신발, 밑창이 얇아 따뜻한 계절 외엔 신기 힘들다.


여하튼  가방을 오랜만에 다시  오늘, 그날이 떠오른다. 무성의했던  친구와, 미움받을까 찌질하게 고민하던

내가 미운 마음을 엉뚱한 녀석한테 쏟아부었던 날.



오늘 가방을 메고 4 만에 보는 친구를 만난다.

지금 이 가방에는 좋아하는 책이 있고, 오늘 산 차 거름망과 하귤 얼그레이 시럽이 있다.

툭툭 열리면 뭐 어때, 그때마다 잠그면 되지, 하는 마음에 쇼핑백을 모두 거절하고 가방 가득 새로운 것들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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