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주부터 일복이 터졌다. 같이 일하던 매니저가 그만두게 되면서 고스란히 모든 업무를 떠맡게 되었다. 갈수록 많아지는 회사의 프로젝트 가짓수에 인원 감축으로 업무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졌다. 회사 메신저 창에 프로젝트 1,2,3,4 별로 업데이트를 하니 너도 나도 분홍 파랑 알록달록 하트, 근육이 울룩불룩한 팔, 컨페티가 흩어지는 폭죽, 원더우먼 등등의 갖가지 이모티콘을 띄우며 응원한다. '이런 이모티콘을 하나씩 받을 때마다, 5유로씩 적립이 되면 일할 맛이 나겠네,'했다.
메신저에 성과 올릴 때마다 받는 이모티콘들. 돈이면 좋겠다.
사실 지금 회사는 여태까지 꾸준히 다니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일이야 어느 회사나 똑같다고 생각해서일지 모른다. 그나마 믿고 보는 프로덕트여서 들어온 회사인데, 다른 곳이라고 크게 달라질까. 다만 최근 지나치게 불어난 업무량이 고스란히 스트레스로 이어지니 이렇게 계속 다녀야 하나를 몇 달간 고민했다. 물론 바로 관두고 싶지만은 않고, 회사랑 조금은 싸워 보고 싶기는 했다. 프로젝트 중에 몇 개만 쳐낸다면 꽤나 해볼 만한 것도 있다고 아직은 생각했다.
그래도 언제나 욱하는 순간은 찾아온다. 잠시 노트북을 덮었다. 사직서를 쓸까 잠시 생각을 했다. 창문을 열고 심호흡을 했다. 다시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켜고, 이 전 여행 사진들을 봤다.
-맞다, 나 다음 주에 마르세유 가지?
마르세유의 말모스크 근처, 2년 전 사진.
일하면서 여행할 수 있는 리모트잡. 우리 회사의 몇 안 되는 혜택이다. 다만, 새로운 회사에 들어가 새로운 사람과 일에 적응하는 것이 설레는 것보다 지치는 것을 보면, 지금 나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어둑어둑한 베를린 겨울에 지쳤는지도 모르겠다. 여행을 하고, 햇빛을 쬐면 지금 있는 회사와 지지고 볶는 일이 별 일이 아니라고 생각될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렇게 지난달에 우리는 프랑스 마르세유행 비행기를 끊었다. 우리가 마르세유에 온 이유는 바르셀로나로 이사를 가려던 계획이 무산되면서다. 프랑스 남부 도시들을 여러군데 둘러봤었고, 우리가 눈여겨 보고 있던 도시 중 하나는 프랑스 제2의 도시이자 지중해 최대 항구도시, 마르세유였다.
몇 년 전, 처음 왔던 마르세유는 참 별로였다. 물어져갈 것 같은 중앙역, 삐걱대는 숙소 건물의 낡은 복도 계단, 수많은 거리의 부랑자들. '이 도시는 볼 것이 생각보다 없다,'는 이야기가 딱히 틀려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선입견이라지만 좋은 첫인상은 아니었다. 숙소로 고르지 말아야 할 지역 리스트만 10 군데가 넘는 이 도시에 과연 우리가 발을 들여 살 수 있을까 생각을 해봤다. 물론 11월에 갔기에 햇빛이 비출 날이 잘 없었다. 도시 전체가 우울하고 추적해보였다. 예쁘다는 파니에 거리도 딱히 예쁘지 않았다. 마르세유는 우리와 앞으로도 딱히 인연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마르세유 꽤나 높은 비탈길에 올라가니 보이던 하늘색 창문을 단 집들.
다만 확실하게 매력적인 것은 우리 나잇대의 사람들이 꽤나 많고, 프랑스에서 파리 다음으로 큰 도시여서 문화생활의 옵션이 많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중해를 맞닿은 태양과 일년 내내 크게 춥지 않은 온화한 기후. 그렇게 우리가 애타게 찾는 조건들 중 세 가지가 맞아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 더 날씨가 화창한 1월 쯤, 마르세유를 다시 찾았다. 바닷가 위주로 둘러보았다. 평화롭고 아름다웠지만 돌아오는 버스에서 가득찬 현지 사람들을 보며 온갖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스페인 꼬르도바에 살면서 마주쳤던 수많은 남부 특유의 사람들이 생각났다. 촌스럽지만 정은 많은 사람들. 국제적인 베를린이나 파리와는 다르게, 조금은 풋내나는 도시. 그래서 나같은 외국인이 살면 인종차별이 걱정될 수 있는 곳. '내가 이 곳에 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프랑스 파리의 사람들은 마르세유를 게토 (Ghetto: 빈민가)라고 종종 말한다. 오랜 시절부터 있던 일종의 선입견이란다. 우습게도 이렇게 말한 대부분 프랑스인들은 마르세유에 가보지 않은 이들이 대부분이다. 반면 마르세유 현지인들은 "여기는 일자리만 있다면 경치 좋고, 날씨 좋고 정말 살기 좋은 곳이다, "라고 종종 말했다. 최근 프랑스 파리, 독일 베를린에서 리모트 라이프를 찾아 마르세유로 이사 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소식을 종종 듣는다.
이 도시에 분명히 우리가 찾던 매력이 있음은 분명했기에, 우리는 이 도시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호기심이 생겼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이 도시에 기회를 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