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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 Nov 29. 2022

외국어를 얼마나 더 하라는 거야?

3개 국어를 하고 다음 언어를 배우기까지.

10년 전, 스페인에서 대학원에 다닐 때, 초청 강사 중 누군가가 바이링구얼(bilingual: 이중언어가 가능한 사람),트리링구얼 (trilingual: 3개 언어가 가능한 사람) 혹은 멀티링구얼 (multilingual: 다중 언어가 가능한 사람)이라고 하려면 해당되는 언어를 생각 없이 내뱉을 수 있는 수준이어야지, 조금 하는 수준은 안된다고 했다.


스페인에서 영어를 할 줄 아냐고 하면 "예스(Yes)"라고 하는 이들이 독일에서 영어를 "어 리틀 빗 (A little bit)" 한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잘 못하다 보니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나는 트리링구얼이다.


스페인에서 영어와 스페인어로 일을 하고, 저녁에 스페인어로 된 대학원 수업을 듣고, 집에 돌아오면 플랫 메이트들과 스페인어로 수다 떠드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 때 당시 장거리 연애중이던 플로와는 스카이프를 켜고 영어를 썼다.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시간은 가족과 카톡으로 이야기하거나, 오전 근무하면서 한국에 있는 팀과 회의차 전화를 하던 하루의 단 1시간 정도뿐이었다.


스페인에 사는 동안, 플로를 위해 프랑스어를 조금 더 공부해보자고 생각했지만 하루 일과가 끝나면 나의 뇌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스페인에 오기 전 한 달 동안 어학원을 다니며 갈고닦았던 그때 당시 A1 수준의 프랑스어는 진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퇴화했다. 


다음 외국어는 독일어냐, 프랑스어냐를 둘러싼 나의 내적 갈등은 사실 이때부터 시작이었나 보다. 당시 대학원 수업 중에 비즈니스 독일어 수업이 있었다. 대학원을 다닐 당시만 하더라도, 졸업 이후 독일에 살 거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는데... 취업률이 워낙 낮은 스페인. 일자리가 많은 독일로 많이 가니 비지니스 코스에는 독일어가 선택과정으로 있었다. 같은 학과 스페인 친구들은 우리가 자라면서 중국어, 일본어를 배우듯 제 2외국어로 독일어를 기본적으로 하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나에게 독일어는 난생 처음 보는 언어였는데, 학점을 따려면 어쩔 수 없이 배워야했다. 


하루는 교수님이 문장을 읽고 해석을 하라고 시켰다.


-쑨?


내 이름은 썬(Sun)인데, 정말 끝까지 자기 마음대로 부르는 스페인 사람들. 책에 있는 독일어 문장을 꾸역꾸역 해석했다. 한 문장을 겨우 해석하자마자 맨 뒷자리에 앉아있는 나를 일제히 모두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고 웃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하고 옆에 앉은 내 친구를 쳐다보니, 


-너 방금, 독일어를 스페인어가 아니고 영어로 번역했어, 


라고 하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 지금 3번째 외국어를 2번째 외국어로 공부하려는데 얼마나 수고가 많냐. 


교수님도 안쓰러운 표정으로 웃으셨다. 그리고 나는 그날부터 스페인 애들 사이에서 언어의 레전드처럼 여겨졌다. 물론 그때 당시 독일어라고는 시험용 표현을 외우는 수준이었지만.


베를린에 이사 오고 나서 독일어를 좀 더 해볼까 했지만, 하루에 내가 독일어를 쓰는 시간이 5분도 안되는데, 베를린에 얼마나 더 살겠냐며, 나는 초창기 A2 레벨쯤 독일어를 포기해버렸다. 대학원 때 배운 독일어는 시험장을 나오면서 다 까먹은 지 오래다. 여태까지 내 인생을 열심히 사는데만 힘 쏟았으니 이제 좀 느긋하게 살아보자고 다짐한 것도 있었다. 물론 이러면서도 정작 매년 일부 단어나 표현들은 의무감으로 조금씩 외우기는 했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독일어에 쏟은 노력의 전부다. 


'언어를 3개나, 그것도 이 정도면 꽤 잘하는 것 같은데 대체 얼마나 더 많이 하라는 거야,' 라는 생각이 매일 들었다. "독일 사니까 독일어도 잘하겠네?"라는 질문도 처음에는 웃어넘겼는데, 계속 들으니 성가셨다. 베를린에서는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가 독일어보다 훨씬 더 많이 쓰이지만 독일에 사니, 독일어를 써야하는 상황은 반드시 있다. 프랑스에 갈 때마다 그의 가족들 사이에서 기나긴 식사 내내 벙어리가 되는 기분도 점점 더 싫어졌다. 살아온 세월이 있으니 간단한 대화는 알아듣고 뭐가 뭔지는 대충 알지만 내 의사를 마음대로 표현 못하는 바보가 되는 기분이 독일어로도, 프랑스어로도 언젠가부터 너무 싫었다. 스페인에서 혼자서 아무랑이나 이야기도 잘하고, 온 지역을 쏘다니며 혼자 척척 모든 것을 해내던 자신있던 내 모습을 잃은 것 같아서 더 그렇다.


-언어를 배우던지, 떠나던지- 이게 나에게 남은 선택지라고 생각되었다.



그렇게 독일어냐, 프랑스어냐 내적 갈등만 몇 년째 하던 내가 작정하고 프랑스어 공부에 몰두하게 되었는데 우리에게 최종 목적지가 독일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지면서였던 것 같다. 그리고 혹시나 프랑스에 살게 된다면,  지금 하는 고민을 똑같이 하며 내 앞으로의 평생을 살고 싶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이 아무래도 가장 컸다. 어차피 피하지 못할 것이라면 이왕 선택한 거 제대로 하자 싶었다. 그래도 기본 대화는 텄으니 되었다고 했지만 산 넘어 산이다.


공부를 하면서 학생 때만큼 쉽지 않다는 걸 느끼고, 뇌가 회전이 안 되는 걸 느낀다.
프랑스어는 왜 이렇게 악센트도 많고, 묵음도 많고 해도 해도 발음이 안되고 안 들리는 단어도 수백 가지인 것인지 매일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본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되뇐다, 혹시라도 프랑스에서 지금처럼
 관공서에서 할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무시당할 것인가? 혹시라도 애를 낳았는데 애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들으면 어쩔래?라는 생각들이 나를 채찍질한다. 


프랑스어 공부가 하기 싫은 날이면 괜히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플로에게 투정을 부려본다. 한국에 갈 일도 자주 없는데, 꽤나 기본적인 문장들을 구사하고 줄곧 내가 하는 말들을 알아듣는 것을 보면 플로에게도 한국어 짬밥은 생긴 것 같다. 


그래도 그렇지, 프랑스어 B2 레벨은 나에게 너무 어렵다. 방금 썼던 악센트가 왼쪽 방향이었는지 오른쪽 방향이었는지 돌아서면 까먹는다. 백 번을 들어도 안 들리는 단어는 끝까지 안 들리는 것 같다. 내 인생 어쩌다가 나이 서른 중반이 다 되어 새로운 언어를 또 배우고 앉아있는지, 그냥 팔자려니 하며 외쳐본다. 


-Putain. (쀼땅 -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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