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왜 파리 근처에서 태어났니, 이탈리아나 스페인 같이 지중해 근처였으면 얼마나 좋아. 바다도 맨날 가고.
베를린의 여름. 초록초록한 나무들이 우거진 비어가든에 앉아 프랑스인 남편, 플로와 맥주를 마시던 중 내가 무심코 던진 말이다.
-그럼 너는?
그가 대답했다. 너무 맞는 말이라 웃음이 나왔다.
-그러게, 우리 둘 다 좋아하는 지중해 하고는 참 멀리 있는 도시에서 자라났네.
술 마시고 웃자고 한 이야기였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또 하나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꼭 가족이 있고 누가 있어야 가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그곳에 갈 이유를 만들면 된다. 그렇게 지중해를 향한 우리의 이사 계획이 찬란했던 지난 날들. 안타깝게도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바르셀로나행 계획은 여러 난관으로 틀어졌지만, 우리는 지금 있는 베를린에서 행복하게 지내는 법에 더 열중하고 있다. 덕분에 우리가 이곳에서 다져온 인연들과 쌓아온 모든 것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시시 때때로 지중해 근처에 언젠가는 살 수 있겠지라는 희망은 버리지 않으면서 말이다.
7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자리 걱정 없이 세금 꼬박꼬박 내며 별 큰탈 없이 지내온 베를린. 무엇보다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만큼 마인드가 오픈되고 이 정도로 국제적인 커뮤니티가 형성된 도시를 애타게 찾아보았지만 좀처럼 찾기 힘들다. 서울처럼 모든 것이 빨리 돌아가는듯한 복잡한 런던, 파리는 너무 당연하게 베를린만큼이나 외국인들이 넘쳐난다. 다만 복작한 서울과 파리에서 온 우리에게 여유로움을 주는 베를린이라는 대도시는 아무래도 포기하기 힘들었다. 도시가 큼직하다 보니 그 어디에 가도 북적하다는 느낌을 느낀 적은 잘 없던 것 같다. 물론 최근들어 출퇴근 지하철은 꽤나 붐비는 것 같지만 대략 20분, 30분이면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도착하는 이들에게 사람으로 꽉찬듯한 지하철을 하나 보내고 5분 뒤에 다시 타는 여유는 너무 당연하다. 집 앞에 조금만 걸어나가면 한적하고 푸른 잔디와 나무로 우거진 공원에서 너도나도 자리를 펴고 여유를 즐긴다. 주중에 일이 끝난 오후 6시쯤이면 이미 여름의 비어가든이나 길에 즐비한 바들은 북적한 사람들로 활기롭다.
물론 베를린의 여름은 해마다 운이 좋아야 한다고들 하는데, 8월이면 한 여름철이어야 할 날씨에 하루 전까지만 해도 여름옷을 입다가 갑자기 겨울 옷을 꺼내 입어야 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운이 좋은 여름날이면 우리는 종종 공원에서 피크닉을 하고, 바에 나가 햇빛을 즐기고 맥주를 한 잔 들이키며, 각종 야외 콘서트를 즐긴다. 서울처럼 20대, 30대, 40대, 50대가 노는 곳이 암암리에 정해진 사회적 약속 따위는 없다. 그 어디를 가더라도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베를린의 여름. 우리는 7년이 넘는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매년 베를린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하는 때는 아무래도 긴긴 잿빛 겨울이 시작되는 10월, 11월 그 쯤이다. 베를린에 이사 온 첫해는 눈이 정말 많이 왔다. 중고 가구나 전자기기를 사는 것이 꽤나 당연한 베를린에서 중고 텔레비전과 세탁기를 사고, 함박눈이 내리는 길거리에서 그것들을 옮기느라 애를 꽤나 먹었던 기억이 있다. '1년 살고 생각해보자,'라는 생각으로 중고 가구들을 샀는데, 지금 살고 있는 집의 가구들이 삐걱대고 전자기기를 한 번 교체할 정도의 7년이라는 세월이 눈깜짝할 사이에 흘러갈줄 누가 알았을까. 베를린에 살고 있는 수많은 외국인들은 하나같이 새해 계획으로 내년에는 베를린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겠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그들은 모두 우리처럼 그 다음해에도 함께 모여 창밖에서 베를린 길가마다 사방팔방 쏘아대는 폭죽을 바라보고 있다.
대신 우리는 항상 베를린 겨울을 피해 어디로 여행을 갈까 매년 계획을 짠다. 코로나가 터지기 몇 년 전부터 나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리모트잡을 구했다. 플로는 꾸준히 온라인 사업을 운영 중이다. 처음부터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오후 3시면 어둑해지는 베를린 겨울의 창밖을 바라보면서 이런 삶을 몇 년씩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의 결론이 지금의 우리의 삶을 만들어낸 것 아닐까 싶다. 겨울의 잿빛 베를린을 떠나 유럽의 지중해를 마음껏 느끼며 일을 하고 휴가까지 쓸 수 있는 환경이라니. 덕분에 겨울마다 우리는 햇빛이 내리쬐는 유럽의 남부 국가들을 찾아 다닌다. 이렇게 살면서 행복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으니 이 과정의 반복을 조금 더한다고 해도 나쁘지 않다.
베를린 집 근처 공원, 어느 날씨 좋던 주말 오후
프랑스에서 올린 결혼식 당일 전 날, 서로에게 편지를 썼었다.
필리핀의 코론 섬에서 카약을 타고 바다를 건너는 모험을 하다가 죽다 살아날 뻔했던 일. 모로코 와자 잣에서 영화에서 볼만한 기이한 정글 같은 곳에서 석류를 따먹어봤던 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캄보디아 시암립의 영화 같은 해돋이를 함께 옹기종기 모여 앉아 봤던 일. 그리스의 로도스 섬에서는 바퀴벌레 대 환장극에 집주인과의 싸움에서 돈의 절반밖에 못 받아내고는 그래도 우리 팀워크가 좋았다며 바닷가 앞에서 마신 캔맥주 하나에 행복했던 일. 멕시코의 툴룸에서는 길거리에서 타코를 사 먹고 매워서 눈물인지 땀인지 분간이 안 갔지만 타코가 너무 맛있었던 그 순간...
이런 일들을 둘이 약속이나 한 듯 편지에 비슷하게 담았고 우리가 함께하는 앞으로의 여정이 더 기대가 된다고 끝을 맺었다. 그러니 이 여정이 이제는 부부라는 이름으로, 조금은 여유롭게 가도 나쁘지 않겠다는 것이 나의, 아니 우리 둘의 생각이다. 이제는 1년 단위가 아닌, 3년, 5년 뒤에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를 상상하며 미래를 계획하자고 마음먹게 되었는데, 1년은 너무 금방 가기 때문이고, 너무 많은 변수로 우리를 채찍질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 지금 당장 베를린을 떠날 이유가 딱히 없다면 조금 더 베를린을 우리 방식대로 즐겨보자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