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소설 - 엄마 없는 밤
모든 내용은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고 소설의 모양새를 한 에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에세이 소설이라는 명칭은 없기에 정식 명칭은 소설입니다. 지명과 인물의 이름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영식은 고이 국민학교의 학부형 부회장이다. 학생회장인 헌이의 아빠 경수는 학부형 회장이고 학생부회장인 은주의 아빠 영식은 학부형 부회장인 것이다. 영식과 경수는 동갑내기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다. 영식은 경수가 회장 자리에 떡하니 앉아 있으니, 학교에 올 때마다 자존심이 상해 표정이 어둡다. 은주는 하필이면 경수의 아들에게 매번 졌다.
은주는 공부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의욕이 없다고 하는 것이 옳다. 잘해도 칭찬 한번 받지 못하고 자랐으니, 무언가를 열심히 하거나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없었다. 숙제할 때도 전과의 답을 그대로 베껴 쓰기 바빴고, 일기도 매일 똑같은 내용에 지렁이 꼬부랑글씨로 성의 없이 후다닥 해치웠다.
노느라 바빠서 공부를 못 한 것도 아니다. 은주는 주로 집에서 놀았기 때문에 하루가 길었고 시간도 남아돌았다. 은주의 생활기록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하지 않음'
은주는 왜 노력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노력하고 싶지도 않았다.
학교에서 행사가 있을 때면 학부모들은 뱃일을 제쳐두고 행사 준비를 도왔다. 소풍 갈 때나 운동회를 할 때 그랬다. 소풍은 섬 안에서 바닷가 모랫길을 한참 걸어 널따란 해안가로 가는 것이 전부였지만 학부모들은 선생들을 위해 경운기에 음식을 가득 실어 날랐고, 게임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그날만큼은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운동회날이면 하루 종일 운동장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와 쩌렁쩌렁한 구령 소리가 온 동네를 흔들었다. 동네에 두 개뿐인 구멍가게에서는 리어카에 갖가지 간식을 싣고 원정 판매를 나왔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불량식품이 가득했고, 은주는 가을 운동회 때만 파는 실에 꿴 밤을 특히 좋아했다.
사람들은 소풍 나오듯 김밥을 싸 들고 나와 운동장 구석구석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운동회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운동회날은 온 동네의 잔칫날이었고 학부모들에게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특별한 시간이기도 했다.
운동회의 백미는 달리기였지만 체력으로 하는 모든 일에서 꼴등을 차지했던 은주는 특히 달리기를 싫어했다. 기관지염에 감기를 달고 살다 보니 몸이 약해 조금만 뛰어도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벌렁거린다. 심할 때는 구토를 하기도 했다. 그러니 모든 체육활동의 종합 세트였던 운동회가 즐거울 리 없었고 사람들이 달리기에 열광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6학년의 마지막 달리기가 시작됐다. 출발선에서 뛰어나가 바닥에 깔린 종이에 적힌 사람을 찾아 함께 달리는 경기였다. 은주가 집어 든 종이에는 '학부형 회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학부형 화장이라면 헌이의 아빠 경수를 말하는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빈석에 앉아 있던 헌이 아빠가 보이지 않았다. 은주는 헌이 아빠를 부르기 시작했다.
"학부형 회장님~ 학부형 회장님~~~"
두리번거리며 학부형 회장을 계속 찾았지만, 경수는 그 새 화장실이라도 갔는지 도통 보이지 않았다. 발을 동동 구르며 출발하지도 못하고 있는 은주를 지켜보던 영식은 내빈석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앉았다 일어났다 반복하더니 결국 벌떡 일어나 은주의 손을 잡았다.
"에이~ 모르겄다!! 부회장두 회장이니 깨!! 얼른 뛰어!!"
은주는 영식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무뚝뚝한 영식이 자신을 주시하며 응원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영식은 뒤처진 거리를 좁혀 보려고 은주의 손을 잡고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어른들의 손을 잡고 달리던 아이들은 속도를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기도 했다. 아이들의 실력과는 무관하게 어른들의 실력에 따라 골인하는 순서가 확연히 달라졌다. 구경하는 사람들도 트랙 가까이 뛰어나와 환호하며 소리 높여 응원했다.
뒤늦게 출발했지만, 예상보다 꽤 달리기를 잘했던 영식 덕분에 은주가 앞서가는 사람들을 추월하는 경이로운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은 추월해 나가는 은주네 부녀를 보며 열광했다. 열렬히 응원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며 은주의 심장도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영식은 은주가 넘어지지 않을 만한 속도를 유지하며 바람처럼 달렸고 은주는 발이 땅에 닿지도 않고 날면서 달리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날 은주는 처음으로 달리기에서 2등을 했다. 아쉬웠지만 잘 달렸다며 영식은 은주의 머리를 한번 쓱 쓰다듬고는 환하게 웃었다. 은주는 영식의 환희에 찬 미소를 처음 보았다. 행복했지만 이상하게 슬펐다.
영식은 국졸에 대한 좌절감이 크다 보니 고졸인 친구들 앞에 서면 절인 배춧잎처럼 풀이 죽어 있었다.
영식이 부족한 자신감을 대체하는 방법은 세상 좋은 사람인 양 자신의 것을 퍼주는 것이었다. 영식의 삶은 그랬다. 어머니에게도, 친척들에게도, 친구들에게까지... 자기 돈을 쓰고, 시간을 쓰고, 마음을 쓰며 호구 노릇을 자청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들과 섞이고 싶었던 것이다.
영식의 친구들이 은주네 집에서 기르던 진돗개를 끌고 가 잡아먹는 일이 벌어졌다.
백구는 체구가 작고 마른 은주에게 버거운 덩치였지만 똑똑하고 순해서 정이 많이 갔던 개다. 은주가 밥을 들고 다가가면 반가움에 앞발을 들고 달려들어 옷을 흙투성이로 만들었다. 들어 올린 앞발을 피하려다 뒤로 넘어지기는 일도 자주 생겼지만, 집에서만 놀던 은주에게는 백구를 비롯해 오리, 닭, 처마 밑에 제비와 마당의 개미들까지도 모두 친구였다.
마을에 잔치가 있을 때면 돼지를 잡거나 개를 잡았는데 잔인하게 때려잡거나 찔러서 죽이는 광경은 목격하고 기겁한 적이 있었던 은주는 백구를 절대 잡아먹지 말라며 영식에게 부탁했다.
"아빠~ 우리도 백구 잡아먹을 거야? 아빠 개고기 좋아해?"
"이... 좋아허기는 허는디..."
"백구도 잡아먹으려고 키우는 거야? 백구는 잡아먹으면 안 돼!!"
"그려... 백구는 니들이 좋아허니깨..."
"절대로 잡아먹으면 안 돼!! 알았지?"
"그려... 알었어! 걱정허지 말어!"
영식도 처음에는 그냥 집 지키는 개. 남이 키우니까 우리도 키운다는 식이였지만 뱃속에 새끼도 있었고 정이 들어 잡아먹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영식의 친구들은 돌아가며 개를 잡았고 이번에는 영식이네 집 개를 잡자는 말에 영식은 대답하지 못했다. 영식이 대답이 없자 친구들은 비겁하게 집이 빈틈을 타 백구를 끌고 나갔다. 그러고는 쥐약을 먹고 죽어서 잡았다는 씨도 안 먹힐 거짓말을 했다. 사실을 다 알고도 영식은 친구들에게 화를 내지도 못했고 백구의 소식을 듣고 목 놓아 우는 은주 앞에서도 아무런 변명을 하지 못했다.
어차피 배우나 못 배우나 뱃일하고 사는 것은 다 똑같고,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였는데도 영식이 친구들 앞에서 작고 부족한 사람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릴 적부터 받아왔던 무시에 익숙해져 스스로를 작고 초라한 우물 안에 가둔 것이다.
영식의 주변에는 영식을 선대 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은주는 영식을 무시하고 함부로 하는 친척들과 섬사람들이 싫었다. 은주는 영식처럼 기죽어 살기 싫어 냉대하는 그들과 섞이기를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