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오랫동안 그리고 자주 은퇴에 대해서 고민한다. 40대 중반에 한창 일 할 나이라서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욕도 먹지만, 숨길 수 없는 진심이다. 밥을 먹거나 운동을 하거나 일을 하다가도 불현듯 은퇴가 떠오른다. 심지어 꿈도 꾸는데, 꿈속에서 은퇴한 다음 삶을 그리는 게 아닌 은퇴를 준비하는 과정이 조각조각 나타난다.
마흔 해를 넘게 살아내며 대단한 일을 이룬 것도 아니고 실패나 좌절을 겪은 것도 아닌데 그냥 막연하게 은퇴를 하고 싶다. 물론 현실적인 문제로 당장 은퇴할 순 없으니 결국 은퇴 시기를 정하고 어떻게 준비할지에 방점을 둔다.
사실 은퇴를 여러 번 결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 밖으로 끄집어내거나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다 보니 지금껏 쭈글탱이로 산다. 아내에게는 수시로 말했지만 일하기 싫다는 투정으로만 들렸을 게 뻔하다. 그래서 차분하게 은퇴를 생각하고 글로 쓰기로 했다.
활자 뒤에 숨어서 작은 용기를 내려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한창 정신없이 지냈던 시간을 잠시 멈추던지 아니면 되돌리던지 그것도 아니면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만들고 싶은 의지를 표현하려고 한다.
평일 오후에 갑자기 시간이 비어서 예전부터 가고 싶은 전쟁기념관 도서관을 찾았다. 긴 책상 끝 빈자리에 앉아서 키보드를 꺼내 담고 싶은 이야기를 타자기(키보드인데 타자기라고 썼다. 정신없는 나를 표현하는 적당한 단어로 보여서 수정하지 않았다)로 한자씩 눌러 꾸역꾸역 담았다. 글 줄기나 맥락도 없이 머리나 가슴이 아닌 온전하게 손가락으로만 글을 담았다.
한참 쓰다 보니 아무 말이나 내뱉는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귀를 통해 들어오는 음악도 감성이나 이성을 자극하지 못했다. 졸리지도 않고 멍하니 자판만 눌러댔다. 누르다 보면 익숙한 문장이 생겨날지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가끔 주변을 살피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지금껏 내가 살아온 방식과 똑같았다. 산만함과 맥락 없음이다.
새벽에 일어나서 글을 쓸 때와 비슷한 느낌도 들었다. 멍한 상태로 의식하지 않은 채 활자를 조립한다. 어쩌다 보면 글이 완성되기도 한다. 가끔은 스스로 쓴 글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만족할 때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엄청난 명문이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복잡하게 얽힌 것들이 조금씩 풀려가는데, 그 과정을 통해서 우연히 해답을 찾을 때도 있다.
폭염에 숨이 막히고 바빠서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없었는데, 조용하고 시원한 도서관에 앉아서 무의미한 활자를 조합하다 보니 숨통이 트였다. 어쩌면 숨이 막혀 죽어버릴 수도 있었는데, 손가락에서 시작한 글이 생명을 조금 더 연장해 줬다. 은퇴도 삶에서 글과 같은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때마침 소나기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