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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남세아 Sep 30. 2024

큰딸이 외박을 했다


외자로 시작하는 단어는 하나같이 마음에 드는 게 없다. 외도, 외로움, 외면, 외골수, 외설, 외환위기, 외람된 말씀, 외워라 등 짜증 나고 불편하거슬리는 단어뿐이다. 그중에서도 외박이 가장 싫은데, 사랑하는 큰딸이 첫 외박했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썩 내키지 않는다. 덕분에 잠은 안 오고 새벽 네 시에 심통 난 상태로 글을 쓰고 있다.



물론 나도 출장이나 급한 일을 처리하려고 사무실에서 밤새우며 어쩔 수 없이 외박을 한 적은 있다. 아내도 마찬가지인데, 행이나 당직근무 때문에 외박했던 정도는 있다. 하지만 큰 딸은어쩔 수 없는 외박 경험자 부모와 다르게 오롯이 먹고 마시며 놀기 위해서 생애  외박을 감행했다.



외박은 사전에 '자기 집이나 일정한 숙소에서 자지 아니하고 딴 데 나가서 잠'이라는 뜻이다. 우리 '바른 부모'가 외박했던 사례는 사전에 쓰인 외박 범주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큰딸은 단어 뜻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딴 데 나가서 자는' 확실한 외박을 한 것이다.



내가 심통 난 것은 어려서부터 할리우드 화에 학습된 탓일 수도 있다. 영화에서 딸이 졸업 파티를 갈 때 에스코트하러 오는 시원찮은 놈들에게 멋쩍게 인계하는 아빠들 모습이 새겨졌을 수도 있다. 대범한 난 분명 다른데, 이상하게 할리우드 아빠들과 겹친다. 여하튼, 현실에서 그런 거지 같은 상황은 없었으면 한다. 어쩔 수 없이 발생한다면 리암 니슨 표정으로 대할 생각이다. 흉흉한 세상에 불편한 뉴스를 많이 봐서 그런지 혼자 외박을 떠나는 딸을 꼭 안아주고 인사한 다음 몰래 미행하려다 참았다.





군대에서 외박은 달콤한 선물처럼 느껴진다. 가끔 휴가보다도 귀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전우들과 부대 근처 읍내나 도심지로 나가서 맛있는 음식과 술을 즐기고, PC방에서 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보기도 한다. 노래방이나 볼링장 같은 곳에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면회 온 사랑하는 사람과 따듯한 시간을 보내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하다. 스마트폰 용이 허용되면서 절실하던 외박 가치는 떨어졌지만 아직까지도 한 존재이다.



그런 느낌으로 내가 사랑하는 큰딸이 외박을 나갔다. 글을 쓰는 내내 책상 거울에 비친 내 표정을 보니 불독이 떠오른다. 물론 큰딸은 이 시간에 곯아떨어졌을 게 뻔하다. 래도 잠자리는 편안한지 잘 씻고 잤는지 주변에 잠버릇이 고약한 녀석 때문에 불편함이 없는지 등등등 여러 걱정이 몰려온다.






사실 큰딸은 태권도학원 외박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파티도 하고 영화도 보면서 태권도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자는 프로그램인데, 본인이 희망하길래 보냈다. 지난번 파자마 파티 때는 자정이 다 되었을 때 부모 보고 인솔하라고 해서 귀찮았는데, 이번에는 심야 영화 시청 이후 취침까지 신경 써준다니 부모 부담이 다.



그래도 첫 외박이다 보니 신경 쓰이는데, 어련히 알아서 해줄까라고 믿고 맡겼다. 래서 딸이 집을  때 불편한 마음은 없었다. 원에서 늦은 시간에 아이들이 파티하는 모습과 재우는 사진까지 친절하게 시간으로 내주기도 했다. 덕분에 편히 잠들었다가 벽에 일찍 일어났는데, 큰딸이 보이지 않으니까 괜히 심통 났다. 그래도 리우드 아빠 코스프레하며 글을 쓰니까 심통은 조금씩 사그라들었.





다만, 학원에서 째는 어려서 대상에서 제외시킨 게 아쉽다. 자녀들 모두 외박했다 금에 집집마다 막내가 더 생길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그렇다면 태권도장은 회원수도 늘릴 수 있는 반사이익을 얻었을 텐데, 다소 떨어진 기획력에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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