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퇴사 목록 06화

6화. 편집 디자이너

by 안다훈



한 해 전 웹 하드 회사를 그만둘 즈음 인쇄소에 꽂혔다. 구인 구직 사이트를 뒤지다 결정했지 싶다. 기술을 배우려 했으나 정보가 부족했다. 달리 방법이 없어 이력서를 뽑은 뒤 을지로와 충무로와 성수동 인쇄 거리를 돌아다녔다. 연휴라 문 연 곳이 적었으며, 어쩌다 인사드려도 반응은 시큰둥했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는 한 부도 못 드렸고 미리 사 간 비타500만 겨우 몇 병 드렸다. 준비한 질문지는 꺼내지도 못한 채 무거워진 가방을 메고 돌아왔다. 그땐 그게 최선이었다.

다시 검색하다가 최근까지 활동한 블로거를 찾았다. 낯선 사람의 연락에 경계하셨지만 진심으로 다가가니 만나 주셨다. 내가 만든 문서와 질문지를 챙기고 커피와 쿠키를 사 갔다. 인쇄소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결론이 몇 분 만에 나왔다. 대신에 그분은 내가 한 활동들을 고려해서 편집 디자인을 권하셨다. '인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터를 공부해라'가 핵심이다. 한 시간을 있었다 치면 인쇄소 얘기는 십 분도 하지 않았다. 돌아와서 알아보다가 문득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어 관뒀다.

'이게 아닌데' 하며 코딩으로부터 도망치자 이 일이 기억났다. 며칠을 알아보고 고민하다 편집 디자인 국비 지원 학원에 등록했다. 기존에 GTQ 포토샵 1급을 따 봤기에 포토샵은 어렵지 않았고 일러스트레이터나 인디자인도 할 만했다. 배울 땐 재밌었지만 한 달에 한두 번 이상 보는 내부 평가는 만만치 않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게, 정해진 시간 내에 과제를 수행하고 공개적으로 평가받고 점수가 매겨진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남들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으며 감을 못 잡아 시작하는 데 한참 걸렸다. 늘 아슬아슬했다. 칭찬은 조금 받고 지적은 많이 받았다. 내부 평가를 치르면서 포트폴리오도 준비했지만 '퀄리티고 뭐고 완성만 하자'가 목표였다. 여차저차 학원을 수료했고 포트폴리오 중 '포트'까지만 완성한 무엇을 발표했다. 틈틈이 준비한 국가 자격증도 두 개 다 최종 합격했다.

한 달여간 쉬고서 광고 회사에 면접을 보고 붙었다. 가족 회사이고 대표님이 아버지, 직원 중 한 분이 딸, 남편분은 과장인가 그랬다. 서넛 정도 직원이 더 있지만 현장에 나가서 얼굴을 못 봤다. 사무실 안쪽에 커다란 출력 기계가 놓였고 자잘한 기계들도 곳곳에 자리를 차지했다. 회사와 공장이 뒤섞였다는 인상을 받았다. 여러 사이트에 회원 가입하고 파일을 내려받다 보니 오후가 됐다. 내 수준을 확인하기 위해서인지 몰라도, 작업해 보라며 파일 하나를 던져 주셨다. 포토샵의 빈 작업 창을 보자 또 한 번 학원에서 느꼈던 막연함이 엄습했다. '이 분야에 남아 있는 한 벗어날 길이 없겠구나' '아직 사람들이 어떤지 모르지만 이런 업무를 하며 쭉 일할 수 있을까'…. 나이 서른 먹고 중고등학생이나 대학생 때도 안 하던 행동을 했다. 어머니께 전화 드려서 더 다니는 게 옳을지 모르겠다고 말씀드렸다.

잡무를 처리하다 여섯 시가 됐다. 대표님이 저녁 먹고 가지 않겠냐고 말씀하셨다. 보통 첫날에는 칼같이 시간 맞춰 들어가라는 말을 들었기에 당황했다. 괜찮다며 거절하고 나왔다. 퇴근과 퇴사가 동시에 이뤄졌다. 내일 직장에 알릴 생각을 하니 죄송했고, 얼마 전에 취직 기념으로 저녁을 산 내가 우스웠다. 집 근처 터미널까지 한 시간 가까이 걸었다. 이대로 집에 가서 어머니를 볼 자신이 없었다. 오는 연락을 받지 않았다. 피시방에 갔다. 의미 없는 짓을 반복했다. 구직 사이트에 들어가서 할 수 있을 만한 분야에 체크하고 구인 글을 클릭하는 일. 새벽쯤 집에 들어갔다. 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 있으나 두 번이나 직접 확인했다. 단추를 잘못 채웠으면 처음부터 다시 채워야 하는데 난 그저 다음 단추를 채우기에 급급했다. 커피와 점심을 얻어 먹고 하루 동안 앉아 있다 온 사람, 그게 나였다.







빈약하지만, 당시에는 버겁게 완성했던 포트폴리오입니다.









인스타그램: @anda.h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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