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셔로 열흘 일하기로 했는데 뒤늦게 전화가 왔다. 판매직을 할 수는 없냐고 묻기에 안 해 봤는데 괜찮냐고, 어렵지 않냐고 되물으니 할 만하다 해서 한다고 했다. 예전 같으면 안 했겠지만 이것저것 하고 나니 뭐... 못 할 게 있나 싶었다. 알고 보니 백화점은 이름만 빌려줬고 상품은 다른 데에서 들여왔다. 난 수영복으로 유명한 브랜드의 옷을 팔았다. 이삼 년 전에 생산된 아웃도어, 추리닝, 패딩, 홈 웨어, 양말 등등을. 오는 손님마다 수영복은 없냐고 물었고 당연히 없었다. 그럼에도 오픈빨은 끝내줬으며 열흘인가 이 주쯤 정신없이 바빴다.
다른 알바생 '제이 누나'도 함께였다. 넉살 좋고 친화력 높은 사람이었다. 단순한 일이라 둘 다 하루이틀 만에 익숙해졌다. 가격 외워서 안내하고, 계산하고, 판매 수량 기록하고, 매대랑 옷걸이에 걸린 옷을 정리하고. 남자가 나밖에 없어서 창고 갈 일 있으면(안 쓰는 층을 창고처럼 썼다) 같이 가서 옷 가져오고. 빈말로도 들은 적 없는 얘기를 처음 들었다. 일을 잘한다는 말. 기념비적인 순간이다. 더 일해 줄 수 있냐길래 십일월 말까지 한 달 더 근무했다. 통로로 연결된 옆 백화점 이 층에서도 옷을 팔아서 그쪽으로 가고. 입구 앞에 천막 치고 파는 곳으로도 가고. 백화점 일 층에 있는 매장에 가고. 매니저님들은 자리잡을 때까지만 오셨기에 나중엔 알아서 창고에 있는 물건을 꺼내 왔다.
거품은 예상보다 일찍 빠졌다. 손님도 매출도 눈에 띄게 줄었고 메신저로 보고하면서 마음이 불편했다. "얼마 이상은 팔아야 하는데." "주말이면 얼마는 찍어야 하는데."도 얼마 안 갔다. 다른 매장에 옷을 가져다 줄 때마다 타 매장 직원분들로부터 쏠리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달그락거리는 엘카(손수레)를 끌고 다닐 때면 눈치마저 보였다. 한 층에 손님이 서넛도 안 될 때가 잦다 보니 장사를 접으시는 분이 여럿 생겼다. 매출 없는 날이 몇 번 있었고 안 되는 곳들은 근처만 가도 울적했다. 숨 막히는 공기 속에 서 있는 분들은 그저 버티는 듯했다. 여사님이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이쪽 일은 경험 삼아 했다 치고 다음부턴 하지 말라는.
상황이 이러니 매장별로 한 명씩만 배치됐다. 제이 누나는 인맥이 있다고, 행사 주최사 사장님의 누나분(부사장님)과 십수 년 된 친구라고 자랑하더니 자라 매장으로 옮겼다. 배신하는 기분이라며 고민했지만 결국 잘 해결하고 돈을 더 주는 곳으로 갔다. 다른 매장에서 근무해도 같은 일 층이기에 눈에 보이는 곳에 있었다. 이직 아닌 아직을 한 지 오륙일이나 됐을까, 누나가 일하다 말고 가방을 챙겨 집에 갔다. 하루 뒤에는 부사장님이 내게 자라에서 며칠만 일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나야 뭐 돈 더 벌면 좋으니 알겠다고 했다.
조금 지나니 부사장님이 내막을 알려 주셨다. 제이 누나가 돈통에서 돈을 훔치다 들켜서 잘렸다고. 하고많은 관계자 중에 하필 부사장님에게 걸려서. 그냥 보내 줄 테니 집에 가라고, 대신 인연을 끊자고 말했다고 했다. 자신이 사람 보는 눈이 없다며 한숨 쉬었다. 괜히 나까지 눈치가 보였지만 뭐, 괜찮아 보였으니 일해 달라 했을 테다. 자라 매장에서 보낸 시간은 무난했다. 다시 적응해야 했지만 크게 어려울 건 없었다. 새로운 옷들을 보고 종류별로 가격을 외우고 옷에 있는 도난 방지 태그를 떼고 안 가 본 창고에 가는 일 모두 할 만하고 신선했다. 더 일해 줄 수 없냐고 물었지만 따로 할 일이 있고 그전에 잠깐이라도 쉬고 싶기에 거절하고 나왔다.
실은 오지랖 같아서 못 전한 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집에 있는데 제이 누나에게 전화가 왔다. 자라 매장을 그만뒀다기에 나도 모르게 침묵했고, 누나는 눈치 챈 듯 "다 아는구나?"라고 말했다. 그만뒀다고는 들었고 계속 얘기하시는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다고 하니 안심한 듯 부사장님을 욕했다. 근거 없는 뒷담화였다. 자신이 한 행동은 언급하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뒤에 찝찝한 마음으로 번호를 차단했다. 뻔뻔한 모습이, 몇 푼 때문에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낸 사람을 실망시키고 인연이 끊겼다는 게 신기했다. 그 누나는 자라에서 잘리고 전에 일하던 매장으로 가서 일하고 있었다. 간도 크구나,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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