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퇴사 목록 09화

9화. 방송국 계약직

by 안다훈







타이어 공장에서 일하려고 건강 검진을 받았다. 들어갈 날만 기다리는데 공장에 큰불이 났다. 재직자도 쉬어야 했기에 채용은 기약 없이 미뤄졌다. 한동안 단기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행사 스태프, 정부세종청사 이삿짐 운반, 대형 마트 앞 천막 설치, 전단지 배포, 배구장 철수, 도서관 RFID 태그 부착, 벚꽃 축제 교통 통제. 그러다 일일이 구하기 번거로워서 장기 아르바이트를 알아봤다. 제대로 된 취업을 고민해야 했지만 시간을 두고 더 고민하고 싶었다. 물 경력은커녕 경력 자체가 없다시피 한 난 능력도 장점도 애매했다. 어느새 나이마저 그랬다. 서른하나는 베스킨라빈스보다 계란 한 판을 넘어선 숫자에 가까웠다.

이번에는 문구점과 방송국 계약직 중에서 후자를 골랐다. 서울에서 합격했지만 안 갔던 그 방송국. 다시는 면접도 볼 수 없다는 협박(?)을 받았는데, 서울에만 해당하는 말인가 보다. 면접 때 들었던 질문 중 나이 어린 선배들이랑 잘 지낼 수 있는지와 손에 반지가 많네요(양손에 하나씩 꼈다)가 기억난다. 첫 번째 질문에는 서점에서도 나이 어린 동료들과 서로 존댓말을 쓰며 잘 지냈고, 나이를 떠나서 선배 대접을 잘할 수 있다고 답했다. 두 번째 질문에는 어머니께 선물 받아서 반지를 끼게 됐는데, 남은 손이 허전해서 하나 더 끼웠다고 말했다. 붙고 나서 든 생각은 '계약직이라 일 년은 마음을 놓을 수 있겠다'와 '일하면서 다시 뭐 할지 알아보자'였다. 일 년 연장해서 최대 이 년 일할 수 있었고, 취업 성공 수당이나 퇴직금을 받으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스튜디오 촬영





하는 일은 카메라와 촬영 장비를 다루는 게 대부분이다. 촬영은 세 종류로 나뉜다. 스튜디오, 야외 촬영, 중계 촬영. 스튜디오에서는 요일별로 정해진 프로그램을 녹화한다. 미리 지미집을 세팅하고 내 덩치보다 큰 스탠다드 카메라를 살살 밀어서 옮긴다. 필요하면 캐논 카메라나 캠코더를 몇 대 더 설치한다. 녹화하는 동안에는 할 일이 거의 없고 끝나면 정리하는 정도로 간단하다. 야외 촬영은 몇 km 이내면 관내, 넘어가면 관외로 나뉜다. 감독님이 '카메라 어떤 거, 렌즈 세트, 트라이포드 신형, 드론'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그대로 준비하고 자잘한 부속품들은 선배들이 알려 준 대로 챙기면 된다. 와이어리스, 물레, LED 조명, 배터리, ND 필터, SD 카드, 렌즈 클리너, 전기 테이프 등 뭐가 많다. 중계 촬영은 모든 인원이 총 출동한다. 모텔을 잡고 숙박하고 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야외 촬영





야외 촬영은 촬영 감독님과 단 둘이 나간다. 물론 운전하시는 선배님, PD님, 때에 따라서 작가님과 리포터님도 같이 나가지만 나는 감독님만 신경 쓴다. 몸과 장비를 조심하면서 신속히 낄끼빠빠를 잘해야 한다. 감독님마다 선호하는 스타일(이를테면 안전 최우선과 속전속결), 카메라 세팅, 드론 조종기 모드 들이 다 다르기 때문에 하루 빨리 익숙해져야 서로 편하다. 또 PD님 말씀, 바닥 상태(논밭이나 비에 젖은 땅 등), 출연자의 협조, 촬영 흐름, 날씨에 따라 유연히 대처해야 한다. 비 오는 날에 감독님이 들고 있는 카메라에 우산을 씌워 주고 한몸처럼 따라다닌 적도 있다. 난 렌즈 가방과 부속품 가방을 교차해서 메고 트라이포드를 어깨에 얹고서 쫓아다닌다. 그러고 "해 줘."와 "네 알겠습니다."를 반복하다 보면 촬영이 끝난다.

"드론 준비해 줘." 하면 조종기를 드리고 드론을 세팅한다. "ND 필터는 어떻게 할까요?" 여쭤보고 날개를 펴고 배터리를 장착해서 날릴 방향에 맞춰 평평한 곳에 놓는다. 드론을 끝까지 지켜보며 위치를 인지하고 전선에 안 걸리는지 확인하면 된다. 렌즈는 "백마(백미리) 준비해 줘."와 같은 말로 시작된다. 그러면 신속히 렌즈 가방 덮개를 열고 100mm 렌즈의 덮개와 결합부 쪽 덮개를 뺀 다음 빨간색 점이 위로 가게 해서 드린다. 그래야 렌즈를 빨리 교환할 수 있다. 아니면 감독님이 빙빙 돌려서 결합 부위를 찾아야 하고 분위기가 안 좋아진다. 렌즈 가방에는 늘 렌즈 서너 개가 들어 있으므로 그 위치를 숙지해야 수월해진다. 이 밖에도 "트라이포드 높이 좀 낮추자." "음식 찍게 물레 준비해 줘." "LED 조명 좀 음식 쪽으로 잘 비추고 있어 줘." "60D 조명 좀 준비해 줘." 등이 있다.





중계 촬영





중계 촬영은 가끔 나가서 익히기 어려웠다. 중계차의 양옆과 뒤쪽에 카메라 액세서리 박스와 트라이포드와 달리(바퀴가 달린 액세서리)가 보관된다. 중계차는 중계차대로 가고 우리는 따로 출발해서 현장에 도착한다. 박스와 장비들을 내리고 카메라 위치가 정해지면 옮긴다. 감독님이랑 이인 일조로 EFP 카메라를 설치하면 준비는 끝이다.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감독님 옆에서 대기하는데 딱히 할 일은 없다. 가끔 행인을 통제해야 할 때가 있는데, 말씀드리면서도 죄송한 마음이 든다. 야외 촬영이 휙휙 진행된다면 중계차는 뭐랄까, 조금 더 여유 있고 방송국에서 일하는 게 실감나고 낭만이 있달까. 편의점 앞에서 술을 마시다가 모텔로 들어가서 잔다든지, 한밤중에 다 같이 차를 타고 방송국으로 복귀한다든지 할 때면 괜스레 센티해진다.





아마도 중계 촬영 때 찍힌 사진





스튜디오든 야외 촬영이든 결국에는 눈치껏이다. 알아도 눈치껏 모르면 나서지 말고 눈치껏. 아나운서, 게스트, 촬영 감독, PD, FD, 기술팀, 야외 촬영이면 지미집 기사님이나 행인까지 수많은 눈이 지켜본다. 안 그래도 예민한 감독님과 부장님들은 날이 더 설 수밖에 없고, 덩달아 긴장하면서 최대한 도움 되도록 신경 써야 한다. 애매하거나 잘 모르겠으면 빠지는 게 낫다. 방해하지 않는 게 돕는 것보다 훨씬 중요할 수 있으므로. 내가 들었던 말들, "성격이 급해서 손부터 나간다." "손부터 나가기 전에 생각을 해라." "손이 빨라야 한다." "머릿속으로 정리한 다음에 움직여라." "네가 불안해 보이면 보는 사람들도 불안해진다." "예민한 사람들이 많다." "소리 안 나게 해라." "어리버리해 보이지 않아야 한다." "쓸데없는 행동 줄여라."도 이런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이 말들은 다 한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 그분은 내가 차를 구석에 대니 "주차를 왜 거기에 하냐, 어디에 하면 좋다."라며 이해 안 된다는 듯이 참견했다. 서너 번 넘게 말했지만 난 무시하고 계속 대던 자리에 댔다. 이 밖에도 "카페에서 혼자 튀는 음료를 시키지 마라(그런 적 없다)." "야외 촬영 나갈 때 다른 사람들이 먹을 간식을 가져오면 좋다." "오늘은 메모하지 마라." "글 쓰는 습관이 네게 독이 될 수 있다." 들을 거듭 말하며 하나부터 열까지 본인 입맛대로 통제하려 했다. 희한한 집착은 촬영이 얽히면 지독히 찐득해졌다. 그러면서 술만 마시면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뭐에 씌었다 사과했지만 다음 날 또 그럴 사람이라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잔소리의 절반은 그분한테 잘못 배워서 들었고, 선배들은 그분이 다른 곳에 가면 배운 내용 다 무시하라고,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알려 줬다.

아무래도 예민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고 여러 변수로 신경이 날카로울 때가 잦다. 내 옆자리에 앉은 그분도 그래서 그랬던 걸까. 사람들이 고여서 그런지 짬이 낮을수록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듯했다. 기본적으로 말을 세게 하고 설명이 부족하며 온 지 얼마 안 됐어도 능숙하기를 바란다고 느꼈다. 정상인가 싶을 정도로 심각하게 장난을 치는 사람이 있고. 말을 너무 세게 해서 적응하는 데 오래 걸린 사람도 있다. 연세 있으신 한 분은 스튜디오 촬영 끝나고 본인 차에 태워서 집에 데려간 적이 있다. 근무 시간 중에 사적인 일을 시키기 위해서. 회사까지 걸어가라고 했었는데, 다행히 시킨 일을 해결하는 데 오래 걸려서 같이 차로 복귀했다. 물론 괜찮은 사람도 많았다. 이를테면 우연히 만났을 때 음료와 디저트를 사 준다든지.





야외 촬영하러 나가면 음료가 쌓인다.





이제야 욕먹는 단계가 끝나 갔지만, 내게만 관심 많은 그분의 가르침을 빙자한 참견은 여전했다. 웃어넘기거나 장단 맞추는 일도 한계에 다다랐다. 팔 월 이십오 일에 타지로 야외 촬영을 다녀온 날이 결정적이었다. 다 끝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장비를 정리하는 사무실에서, 사절까지 완창한 그분은 미련이 남았는지 다시 일절을 부르셨다. 겨우 풀려나서 운전해서 가던 중에 전화가 왔고, 변명인가 사과와 함께 잘 쉬라는 말을 들었다. god가 부른 〈거짓말〉이 떠오른다. 떠나라고 말하지만 보내기 싫은 마음이 담긴 가사가. 허용치를 벗어난 스트레스에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아찔했다. 그 뒤로는 한마디에도 짜증이 났다. 익숙해지는 몸과 달리 마음은 그렇지 않은 느낌. 마침 타이어 공장 상황이 정리되고 있었다. 조금 쉬다가 다시 들어갈 수 있을 듯했다. 그만두기로 한 말일까지 며칠 안 남은 시 월 이십육 일, 출근하자마자 응급실로 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입원했더니 급성 골수 백혈병이란다. 받고 싶었던 퇴직금 대신 암 진단금을 받았다.









인스타그램: @anda.h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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