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사소하나 소중한 목록 (96%쯤)

by 안다훈



서른세 살에 생애 두 번째 향수를 샀다. 덤으로 받은 핸드 워시를 써 보니 향수로 손을 씻는 듯하다. 거품이 물에 쓸려 나가는 순간 향이 퍼진다. 이토록 향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떠올려 보니 방에는 늘 디퓨저와 섬유 탈취제가 있었다. 향을 포함해 내게 만족을 주는 목록을 적는다.



- 조 말론 런던의 향수

- 양쪽 손목과 목덜미와 옷에 향수를 뿌리는 순간

- 얼마쯤 지난 시점에 손목에 남은 잔향

- 스너글 섬유 탈취제의 포근한 향

- 왼손 검지와 오른손 약지에 낀 반지 그리고 옷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목걸이

- 뜨거운 아메리카노나 카페라테가 적당히 식은 온도

- 연필과 만년필의 중간쯤에 있는 볼펜의 농도

- 마음에 쏙 드는 시를 발견한 순간

- 시인이 쓴 에세이, 이를테면 최승자, 한강, 나희덕, 오은, 문보영, 허수경의 작품

- 아이오와에서 보낸 시간을 다룬 에세이, 최승자의 《어떤 나무들은》과 한강의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과 문보영의 《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

- 한 분야에서 고전으로 꼽히는 책을 여러 권씩 구매하는 일

- 간결한 문체로 쓴 오탈자 없는 책

- 줄 없는 노트에 쓴 글이 기울지 않고 수평이 맞을 때

- 아끼는 공책에 좋아하는 볼펜으로 글을 쓰는 시간

- 꾹꾹 눌러쓴 뒤에 손으로 훑으면 느껴지는 오돌토돌함

- 몰입해서 글을 쓸 때의 느낌

- 한 편의 글을 완성하면 느끼는 뿌듯함

- 글을 쓰다가 잘 안 풀리던 부분을 해결할 때

- 단상에 살이 붙어 그럴듯한 글이 된 순간

- 밀도 높은 글을 끝내고 혼자 뿌듯해하며 하는 박수

- 내가 쓴 글이 누군가에게 위로와 감동을 준다는 점

- 유일한 독자와 주고받는 이메일

- '안작가'라고 나를 불러 주는 몇 안 되는 지인

- 부푼 다이어리와 트래블러스노트

-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은 사진

- 우연히 만난 누군가에게 내 책을 선물하는 일

- 한여름에 지하 주차장에 댄 차를 탈 때 뜨겁기는커녕 약간 선선한 내부

- 선글라스를 낀 채 노래를 따라 부르며 하는 드라이브

- 다른 차가 끼어들 수 있도록 양보했더니 고맙다며 켜는 비상 깜빡이

- 우연히 마주친 고양이를 지켜보다 찍은 사진

- 마음에 드는 문구류와 소품을 발견하고 구매하는 순간

- 모은 소품을 선물하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일

- 귀엽다는 말과 동안이라는 말

- 살 빠졌다는 말과 살 좀 쪄야 할 것 같다는 말

- 하고 싶은 일이나 공부가 생겨서 신나게 알아보는 일

- 다정한 말과 그 안에 담긴 배려심

- 속이 편하고 몸이 가벼운 느낌

- 한겨울에 건조기에서 꺼낸 세탁물을 품에 안을 때의 따끈함

- 많지는 않아도 모은 돈 덕분에 든든한 마음

- 혼자 대청소하고 샤워한 뒤에 마주한 깨끗해진 집

- 이전보다 나아진 내 모습을 보며 지난 시간이 의미 없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

- 문구 투어를 다녀온 뒤에 블로그에 글을 올리려고 '발행' 버튼을 누르는 순간

- 손으로 직접 쓴 편지를 받으며 느끼는 따스함

- 미친 척 용기를 내서 기대한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얻는 성과



못 버리는 버릇 때문에 모이고, 이따금 몽땅 버리는 충동으로 비운다. 그 사이에서 살아남은 물건들. 나름의 서사를 지녔기에 상자나 클리어 파일에 담긴다. 어떤 상자에는 군대에서 쓴 수첩과 베레모가 있고. 다른 상자에는 가족이 썼던 핸드폰이 수십 개 있다. 내가 일하며 남긴 흔적을 클리어 파일에 담았고. 몽당연필이나 파버카스텔 볼펜 리필심 따위를 틴 케이스에 담았다. 사소하지만 소중한 나의 목록. 미니멀리스트가 되고 싶으나 맥시멀리스트가 숙명인지 모른다.








실은 '글'이라고 하기 어려운 나열입니다. 두 번째 책 원고를 준비하며 이것저것 떠올리다 쓰게 된 거였죠. 어쩌면 이 목록 하나하나가 한 편의 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식으로 쓰다 만 글이 90개가 넘습니다. 다 쓴 글, 거의 다 완성한 글, 말 그대로 쓰다 만 글, 초안만 메모한 글 등등. 도입부와 끝맺는 부분과 나열한 부분 등 전반적으로 다듬을 필요가 있는 듯합니다.


(96%)은 '완성도가 96%'이라는 뜻입니다.









인스타그램: anda.hun

* 『문장의 B컷』은 격주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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