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서울로
어찌어찌 추가로 다닌 학기를 마칠 때쯤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졸업 기준을 몇 학번에 두느냐에 따라 뭐가 달라진단다. 이미 한번 취소돼서 타지 생활을 정리하고 왔는데 왜 또 그러냐, 이번 학기 시작할 때 정말 끝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다 하지 않았냐, 수강 신청할 때 말하지 왜 이제 와서 말하냐 따지니 졸업 시켜주겠다고 했다. 단 비밀로 하라고, 어디에 말하면 바로 졸업 취소시킬 거라고 덧붙였다. 이때 통화한 내용은 녹음 파일로 보관 중이다. 지긋지긋한 소란을 뒤로하고 또 한 번 서울로 향했다. 잡지 취재 기자 양성 과정에 참여하기 위해서.
#잡지 교육원
이번에도 고시텔에 방을 얻었다. 이층 침대 덕에 지난번보다 쾌적하다. '잡지사만 잘 찾으면 되지 않을까' 글 관련 일이니 지난번보다 나으리라 기대했다. 아홉 시 반부터 다섯 시 이십 분까지 교육원에 있었다. 집에 와서는 "냥이 말고 '양'이 보고 싶을 때" "바버숍, 내 가능성과 마주하다" "죽어 본 적 있으신가요?" "빈티지 소품으로 가득한 '카페 비요리'" "'서평 쓰는 법'에 대한 서평" 등의 기사를 썼고 동기들과 합평회를 진행했다. 사 개월은 금방이었으며 모든 과정이 끝나고 기억나는 건 한 사람, A뿐이다. 나보다 대여섯 살쯤 많은 그 역시 '내 자존감을 짓밟으며 자신의 자존감을 채우던' 부류였다. 어쭙잖게 가스라이팅 하려던 그였으나 이미 더한 사람에게 일 년간 시달려 봤다. "따돌림 당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라고 들었을 땐 휘청했지만. 떠오르는 일이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진심으로 믿고 힘들어했던 경험.
쓴 글로 원하는 사람과 짝을 이뤄 피드백을 주라고 했을 때 A가 나를 불렀다. 가벼운 마음으로 자면서 꾼 꿈을 적은 글을 건넸고, 그가 쓴 글을 받아서 L 자리에 가 앉았다. A는 PC 카톡이 켜진 걸 몰랐는지 L에게 카톡을 보냈다. 모니터 구석에서 알림 창이 하나씩 올라왔다. "얘 글 읽는데 한숨만 나온다(실제로 한숨을 쉬었다)." "재능이 없다. L 네가 더 재능 있다." "얘 글 문제 투성이다. 넌 희망을 가져도 될 것 같다."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그의 속마음을 보며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그가 준 글은 흠 안 잡히려고 애쓴 게 느껴지는 기사 형식이었다. 그 뒤로는 거리를 뒀기에 크게 뭐가 없었다. 헤드헌터에게 전화 왔다고 수업 시간에 뛰어나가던 그는 다른 수강생들과 마찬가지로 면접 보고 취업했다. 나 역시 교육 과정이 끝나기 전에 일자리를 구하는 데 성공했다. '삶을 기록하는 남자'라는 제목을 단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로.
#교정 교열 기자
전임자가 그만둔 지 열흘쯤 됐을 때 교정 교열 일을 시작했다. 이천십팔 년 십이 월 십팔 일. 마감일은 이십칠 일인데 쌓인 원고가 없어서 번역된 기사들을 최소한으로 고쳤다. 시킨 사람은 없지만 일거리를 가져왔고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피시방에 가서 일했다. 시작은 정신없었다. 그러고 받은 첫 월급 약 팔십만 원과 잡지에 인쇄된 '취재 기자 Editor 안지수' 기뻐하며 다이어리에 기록했다. 한숨 돌렸으니 프로세스를 익힐 차례. 디자이너인 실장님께 파일 드릴 때 신경 쓸 점(공유 폴더에 올리기, 인쇄해서 드리기 전에 쪽수 예상해서 쓰기, 특수 문자 표시하기 등)과 n차 교정할 때마다 주안점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잡지를 발행할 때 꽃이라 할 수 있는 배열표도 휘뚜루마뚜루 만들어지지 않았다. 기사는 마주보게 끝내며(세 쪽이면 펼쳤을 때 마지막 두 쪽으로 끝나도록 배치), 네 쪽일 땐 '기사 두 쪽, 광고 두 쪽, 기사 두 쪽' 구성이 제일 좋다. 어떤 업체는 광고가 홀수 페이지에 있어야 하고, 자사 광고는 가능한 한 뒤쪽으로 미룬다. 발행되는 잡지가 두 종류이기에 배열표도 두 번 작성했다. 이 모든 걸 고려해서 기사 위치를 바꾸고, 내용을 덜어서 쪽수를 조절하고, 이월된 기사 중에서 적절한 걸로 끼워 넣고….
기사를 쓴다기보다 고치는 편이었다. 대개 K 박사님이 번역해 주시는 자료를 다듬어서 실었다. K 박사님과 전화나 이메일로 연락했고, 달마다 일 차 교정 마감 전날에 들러서 피드백을 주셨다. 박사님이 하신 번역은 괴이했다. 희한한 띄어쓰기와 평어와 경어가 섞인 문장과 해석할 수 없는 한국어들. 일일이 연락 드릴 정도를 넘어섰기에 나중에는 원문을 파파고와 구글 번역기에 붙여 넣었다. 그러다 '어?!' 싶어서 구글 번역기와 K 박사님 번역본을 확인하니 95%쯤 일치했다. 말도 안 되는 띄어쓰기를 비롯한 수많은 오류들이 한순간에 이해됐다. ①카메라는 까다로운 까다로운 애플리케이션 ②포장 도로와 오른쪽 방향 데이터 ③사람이나 사람을 식별할 수 있다. ④로봇 한 대로 만으로 도달되었다. ⑤5천 500만 달러 등등. ②는 통행권 데이터 ③은 물체나 사람 ④는 로봇 한 대만으로 ⑤는 2,500만 달러였다. 모터를 다루는 기사에서 '엉덩이'가 나왔을 땐 한숨만 나왔다. 꾹 참다 대표님께 말씀드렸지만 듣는 체도 안 하셨다. 이따위로 일하며 이백만 원을 받는 박사님에게 박탈감만 느꼈다. 뭐 어쩔 수 있나, 번역기야 쓸 수 있다 쳐도 확인 좀 잘 해주시라고 말씀드릴 수 없으니. 가끔 친구에게 말한다. K 박사님이 아니라 구글 박사님이셨다고.
한편에선 자잘한 파도 뒤로 높은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전시회 개최를 준비해야 하는데 담당 직원이 일 년 전에 관뒀다. 직원을 뽑으려 했지만 아무도 안 왔고 아르바이트생도 마찬가지. 대표님의 "지수 씨가 해." 한마디에 내 일이 됐다. 업무 자료가 있는 옆자리에서 서랍에 든 문서와 컴퓨터 파일로 공부했다. 일정표를 짜고, 부스 배치도를 최신화하고, 홈페이지에 파일을 올리고, 이따금 일러스트레이터나 포토샵을 켜서 뭔가를 수정하고, 참가 업체 수십 곳과 코엑스 담당자와 실장님 그리고 대표님과 소통하고. 또, 뉴스레터를 작성해서 보내고, 업체에 제품 사진을 요청하고, 부스 위치와 집기 들을 확인하고, 자료 안 보낸 업체에 재촉하기 위해 연락하고 연락하고 연락하고. 물론 잡지 마감도 하면서. 대표님이 잡지 하나에 한 분씩 총 두 분께 외주를 맡기셨지만 외려 신경 쓸 일이 늘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어졌고 기존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정도로 교정 봤기 때문에. 다행히 전시회는 무사히 끝났다. 사흘 동안 평화로웠고 마지막날엔 후련했으며 해냈다는 뿌듯함이 컸다.
잡지 마감과 전시회 업무가 겹쳤을 즈음에 번아웃이 왔다. 밥 대신 잠을 택하고 모니터만 보다가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면 일을 시작했다. 전임자가 그만두면서 펑크날 뻔했던 경험 때문인지, 대표님은 원고를 두세 달치 쌓아 두라고 하셨다. 내 마감은 지킬 수 없는 목표로 눌러앉았으며 허덕일수록 멀어졌다. 어느 순간 글을 읽기 힘들어졌지만 그럼에도 내 일이 좋았다. 자부심이 있었고 더 잘하고 싶었다. 바닥난 에너지를 쥐어짜듯이 짬을 냈다. 이백만 원 모아서 교정 교열 학원에 등록해 반년간 공부했다. 토요일에는 거의 종일 학원에서 수업받고. 집 와서 모든 내용을 공책에 옮겨 적고. 일요일에도 옮겨 적고. 평일엔 야근 끝나고 와서 옮겨 적고.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공부하는 시간이 위로가 됐다. 구글 박사님의 비중을 최대한 줄이자. 직접 번역하고 교정하면 편하고 월급도 많이 받게 되겠지. 그런 꿈을 꾸며 하루하루를 지탱했다.
이윽고 온몸이 출근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무너지는 걸음 앞에 꿈도 뭣도 소용없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란 걸 알지만 '몸이 안 좋아서 출근 못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문자를 보내고 회사에 안 간 적도 있다. 눈을 떠서 감을 때까지 쭉 괴로웠다. 새해가 되면 대표님이 연봉 인상 건으로 부르신다 들었지만 일월을 지나 이월이 돼도 잠잠했다. 이번 해에도 얼렁뚱땅 내가 전시회 업무를 담당하게 될 텐데, 더는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 역량을 키워도 관심 없고 고생해도 보상은커녕 야근 식대를 육천 원인가 칠천 원을 넘기지 말라는 말이나 들었다. 그만두겠다 말하고 이월 말까지만 다녔다. 이천 년대 느낌이 나는 회사도, 금요일마다 하는 대청소도, 바로 옆에 태권도장이 있어서 책상이 울리고 고함 소리로 괴로운 환경도 모두 안녕이다. 추석 전날에 런천미트는 고사하고 구부정한 자세로 눈치 보면서 말없이 나가던 대표님과도 안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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