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퇴사 목록 03화

3화. 웹 하드 운영·관리

by 안다훈



날 왜 뽑았는지 모르겠다. 말을 잘 듣게 생겼나. 처음 출근한 날부터 두 달간 엑셀에 데이터를 입력했다. 드라마, 예능, 영화, 성인 영화, 애니메이션의 제목, 방송사, 감독, 출연진, 설명, 장르, 연도, 회차를 입력했다. 얼추 마무리되자 포스터 수집하기로 넘어갔고 영화 포스터 10,484개와 드라마 포스터 1,836개를 내려받았다. 웨이브, 티빙, 나무위키, 위키피디아, 씨네폭스 들을 참고하면서. 그래도 못 찾은 게 적지 않을 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다른 건 다 괜찮았는데 진종일 성인 영화 포스터를 저장할 땐 좀 민망했다. 야시시하고 자극적인 사진과 창의력 넘치는 제목들. 바로 뒤에 여자 과장님이 계셨는데 내 모니터가 잘 보이는 위치였다. 엑셀 수천 줄과 JPG 파일 12,320개와 달별로 작성한 업무 일지 파일들. 반년간 일한 결과다. 회사 생활이 어땠나 곰곰이 생각하면 '느리고 놓치는 부분이 많았다'가 결론이다.

"왜 이렇게 느린 거냐." "못해도 지금 하는 양의 1.5배에서 2배는 해야 한다." "우리는 3배씩 했다."라는 말을 들었다. 진위 여부를 떠나 속도를 높이려 했으나 개선되지 않았다. 처음엔 동기 부여 삼아, 나중엔 진지하게, 화장실 안 가고 엉덩이 한 번 안 떼고 일했지만 느렸다. '딸칵'과 '탁'이 내가 내는 소리의 전부였고 말 한마디 없이 손을 바삐 움직였지만 느렸다. 아직도 뭐가 문제였는지 모른다. 매일같이 개발팀에서 요청한 내용을 테스트하면서 회사 생활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무슨 테스트를 해도 내가 제일 느렸고, 다른 사람들은 어땠는지 몰라도 난 부족한 점이 있어서 지적받았다. "이거 했어요?" "이건 왜 안 했어요?" "왜 그렇게 했어요?" "이거 할 생각은 안 했어요?" "다시 해요." 말투까지 재생되는 반말보다 무서운 존댓말. 답이 정해지지 않은 추상적인 일을 한다는 게 내겐 막연하고 어렵게 다가왔다.









텔레그램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마다 놓친 부분이 드러났다. 대답을 잘못하면 꼬투리를 잡고 늘어졌다. 심할 땐 두 시간 동안 타닥탁탁 키보드 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혼났다. 이 정도 갈굼은 군대에서도 못 겪었고 끽해야 절반 정도였는데. 때때로 난 키보드를 치다 말거나, 지우고 다시 쓰는 퍼포먼스를 보이며 고민하는 척하든 시간을 끌든 했다. 무슨 말을 더 해야 할까. 어떤 답을 원하는 걸까. 죄송하다고 했는데. 왜 안 끝날까. 두 시간 동안 시달린 뒤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들어도 긴장되며 심장이 철렁거렸다. 파블로프의 개 같았다. 그러다 안 좋은 예감이 들어맞으면 숨이 막혔다. 개같았다. 당근 없는 채찍으로 조련받는 듯하달까. '내가 있어 봤자 하는 일이 뭘까' '하루빨리 관두는 게 나머지를 위한 걸까' 여섯 달 중 넉 달 동안 고민했다. 쉬고 싶을 땐 계단참에 앉아 있다가 들어왔다.

대부분 이 회사에 오기 전부터 함께 일했거나 다리 건너 아는 관계였다. 그들만 아는 사람들, 공유한 추억, 끼어들기 힘든 틈. 여러 면에서 교정 교열 기자로 일할 때와 비교됐고 외로웠다. 점심 먹고 회의실에 있는 게임기로 남자 선배들이 게임할 때 처음엔 따라갔다. 어차피 난 할 줄 모르고 안 좋아하기에 몇 번 시켜 주다 말아도 상관없었다. 어울리려 했을 뿐 게임은 관심 밖이었으므로. 내처 리액션만 하다 돌아왔다. '내가 여기에 있는 게 눈치 없는 건가?' 싶어 빠졌다. 그랬더니 또 소외되고 너무 겉도나 신경 쓰여 다시 회의실에 들어갔다. 뭘 해도 마음이 불편하고 눈치가 보였다. 이 역시 여전히 답을 모르겠다. 애초에 내 문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지나고 나서 보니 맞는 성향이라는 게 있구나 싶다. 내가 다녔던 곳만 그랬는지는 몰라도. 나는 성격적으로도 일적으로도 그곳과 안 맞았다.

여자 과장님 한 분과 여자 대리님 한 분이 아니었으면 반년도 못 채웠지 싶다. 과장님은 첫 출근했을 때도 잘 챙겨 주셨고 유일하게 따로 만나서 고기를 사 주셨던 분이다. 대리님까지 껴서 셋이 술을 마시기도 했다. 녹아들고 싶은 욕구를 처음으로 충족했기에 고마움이 컸다. 경영지원 쪽으로 가르칠까 생각하셨다는 말씀은 실행 여부를 떠나서 마음 자체가 정말 고마웠다. 시작과 끝을 과장님 덕분에 좋은 기억으로 간직한다. 대리님은 업무면에서 내 사수보다 더 잘 챙겨 주셨다. 도움이 없었다면 일월에 그만두고도 남았을 테니까. 내가 묻지 않아도 나서서 확인해 주셨던 덕분에 더욱 큰 힘이 됐다. 여섯 달을 채운 삼월 말까지만 일했고 마지막 날엔 대표님인가 누군가가 주신 꽃을 받았다. 그 꽃을 들고 오후쯤 일찍 퇴근해서 집까지 한 시간 넘게 걸어갔다. 메신저 단톡방에서 날 내보냈다는 알림을 확인했고, 남은 정마저 떨어져서 메신저를 탈퇴했다.













인스타그램: @anda.h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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