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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나를 오래도록 움츠려있게 하는 사람

by 휴지기

아이가 두세 살 때쯤이었던 것 같다. 무슨 일 때문인가 우리는 친정에 있었고, 나와 엄마는 부엌에서 저녁을 차리는 중이었다. 친정은 부엌과 거실 사이에 미닫이 문이 있어 우리는 아이가 부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닫고 있었다.


남편이 거실에서 아이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펑, 하고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나와 엄마는 깜짝 놀라 거실로 통하는 미닫이 문을 열었는데, 오 마이 갓, 아이는 자지러지게 울고 있고 거실 바닥에는 유리 파편과 흥건한 액체가 가득했으며 남편은 손에서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나는 0.1초쯤 놀라움에 당황스러움에 꼼짝없이 서있다가 바로 남편에게 물었다.


"오빠, 이거 뭐야?"

"유리병이 애한테 떨어지려고 해서 내가 손으로 쳐냈어."


상황인즉 이러했다. 호기심 많은 아이가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다 만지다가 어딘가 위에 올려놓은 담금주 병을 만지게 되었고, 균형을 잃은 담금주 병이 아이 머리 위로 떨어질 찰나에 그걸 본 남편이 병을 손으로 쳐서 아이는 무사하고 남편은 유리에 손이 찔려 피를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소주를 닦아내고 유리 파편을 치우는 동안 남편은 나에게만 들릴만한 소리로 자신의 공을 치하했다.


"역시 내가 순발력 하나는 좋은가 봐. 유리병이 떨어지려는 순간 그걸 쳐내서 애가 안 다쳤잖아."


나는 '그래, 다행이야'라고 말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남편을 조금 원망하고 있었다. 저녁 차릴 시간, 그 짧은 시간에도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 아이를 그런 위험에 처하게 했다는 게, 그래, 애를 혼자 본 적이 없으니 이런 실수를 했겠지 싶어 남편이 원망스럽고 그 상황이 싫었다. 하지만 유리에 찔려 손에서 피를 뚝뚝 흘린 남편에게 차마 그런 말은 못 하겠어서 그 목소리는 입 밖으로 내지 않고 꾹꾹 삼켰다.


남편은 내내 그런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사고를 치는 사람. 그걸 피 흘려서 수습하는 사람. 돌아가신 우리 아빠가 오래전부터 소중히 간직해 오던 담금주를 어쩔 수 없이 깨트리는 사람. 나에게 온 거실에 흥건한 소주를 닦게 하는 사람. 유리 파편을 치우게 하는 사람. 나를 오래도록 엎드려있게, 움츠려있게 하는 사람.


우리는 거실을 오래 공들여 청소했다. 혹시나 유리파편이 멀리까지 튀었을까 봐 소파 밑까지 수납장 뒤까지 물 묻힌 키친타월로 닦아냈다. 우리는 그 뒤 평범한 저녁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남편의 손에는 흉터가 지지 않았다. 유리가 깊게 박혀있었던 것 같은데 남편은, 재생 능력이 좋은가보다.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 앞에 앉아서 잠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은 다 흩어졌지만 아까는 높이 깔린 깨끗한 흰 구름 아래 상아색 구름 덩어리들이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들이 보였다. '아름답다'라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며 살고 싶다. 그런데 움츠려있으면 어둠만 보게 된다. 내 몸과 내 다리로 만든 좁은 공간 그 어둠만을 끊임없이 응시하게 된다.


이제는 거실에 쏟아졌던 담금주가, 유리 파편이 거의 다 치워졌을까?


나는 이제 움츠렸던 몸을 좀 펼치고 싶다. 하늘 위 구름을, 길가의 풀잎을, 떼 지어 날아가는 새들을 보며 아름답다, 살 만한 순간들이다,라고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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