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과 '결국은' 사이에서 일상을 시작한다.

by 휴지기

오랫동안 남편의 번호를 저장해놓지 않고 있었었다. 남편이 남편인 게 싫었다. 휴대폰에 서로의 이름을 저장하지 않았을 때로, 서로 모르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다가 며칠 전 남편의 이름을 '아직은'이라고 저장해 놓았다. 아직은. 언제가 끝일지는 모르지만 아직은 남편이라는 뜻이었다.


거의 한 달째 전화가 끊겨있는 남편은 전화 통화가 필요할 때 카톡으로 '전화'라는 단어를 보낸다. 그럼 내가 전화를 한다. 그래서 남편과 나의 카톡에는, 남편에게 받은 '전화'라는 수신 단어만 쭉 이어져 있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처음에 남편이 휴대폰비를 내지 못해 전화가 끊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아주 큰 충격을 받았었는데 지금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한다. 남편은 나를 나쁜 상황에, 조금 더 나쁜 상황에 자꾸만 체념하도록 만든다.


얼마 전 아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주기 위해 교보문고에 갔었다. 아이와 나는 책을 고르고 있었고, 남편은 다리가 아프다면서 어딘가에 앉아서 쉬고 있겠다고 했다. 아이 책을 다 골라 남편에게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전화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남편이 이미 가까이 와 있어 내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자기의 명칭은 얼핏 보게 되었다.


남편이 말했다.


"나 뭐라고 저장해 논 거야? 이진우? 이진우가 뭐야?"


눈이 나쁜 남편이 발신명을 제대로 보지 못해 나에게 물었다. 나는 대답을 할까 말까 하다가 그냥 해버렸다.


"이진우 아닌데. 아직은 이라고 해놨는데."

"아직은? 결국은이라고 저장해 놓지 그랬냐?"


헛웃음으로 흘려보냈다. 그때는, 아직 2025년도일 때는 말이다.


새해가 밝았다. 새해를 '밝았다'라고 표현하는 건, 새로운 해에 대한 기대 심리가 반영된 것일 것이다. 새해는 밝으리라, 새해에는 어둠이 물러가리라, 나의 새로운 해에는, 밝은 시간들이 이어지리라, 하는.


남편은 남편이 저질러놓은 여러 문제들을 2025년까지는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장담했었다. 그리고 미련하게도 나는 그걸, 12년을 속았으면서도 나는 남편의 말을, 믿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남편에게는 여전히 휴대폰비를 낼 돈도, 나의 대출금을 해결해 줄 여력도, 아이에게 철석같이 약속한 해외여행을 갈 능력도 없다.


결국은, 결국은 이렇게 끝나야 하나 보다. 나의 믿음이 결국은 배신당하는 결말로, 남편은, 의도치는 않았으나 나의 인생 최대의 빌런으로, 그렇게 끝나야 하는 드라마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이가 자주 말한다.


'아빠가 있어서 너무 좋아'라고 말이다.


아이는, 남편과 아파트 단지에서 배드민턴을 30분 치고 와서 헐떡거리며 나에게 너무 재미있었다고 신이 나서 말하고, 남편이 만들어준 탕수육과 크림스파게티를 먹으며, 연어초밥과 수육을 먹으며 연신 맛있다고 감탄을 한다.


커다란 아이가 남편의 무릎에 앉아있으면 남편이 아이의 볼에 뽀뽀세례를 퍼붓고 아이는 그 애정을 듬뿍 받아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아이는 자꾸, 아빠와의 무언가를 꿈꾼다.


우리의 결혼생활이 '결국은'으로 끝나야할 수많은 이유들이 있다. 하지만 '아직은' 이어지고 있다.

'아직은'과 '결국은' 사이에서, 오늘도 허우적거리는 채 일상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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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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