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치 않게 아이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못 미더운 엄마가 되어가고 있다.
아이에게 1년에 한 번씩은 꼭 해외여행을 가겠다고 약속했었다. 어렸을 때 국기카드로 한글을 뗐을 만큼 세계 지리와 문화에 관심이 많은 아이는, 집 밖에 나가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가는 건 아주 신나 한다.
하지만 아이에게 했던 해외여행에 대한 약속은 작년에도, 올해도 지키지 못했다. 티는 안내지만 아이는 내심 서운해하고 있는 것 같다. 해외로 여행을 다녀왔다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가끔, 무심한 듯 전하는 아이의 모습에 마음이 짠하다.
어디라도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저번주에 2박 3일 전라도 여행을 다녀왔다. 남편은 아직도 받아야 할 돈을 받지 못해 휴대폰도 끊긴 상태였다. 심지어 2박 3일 일정이 끝난 다음 날은 남편과 나의 협의이혼확정 1차 기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행을 하기에는 억지스러운 날짜였고 상황이었지만 나는 꼭 가고 싶었다. 아이에게 작은 여행의 기억이라도 만들어주고 싶었다.
없는 돈을 쥐어짜서 하는 여행이었기 때문에 숙소를 좋은 곳으로 예약할 수 없었다. 아고다에서 저렴한 숙소를 찾아 2박을 예약했다. 아이는 숙소를 확인한 후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남편도 비좁은 방에 놀라는 듯했으나 이런 것도 낭만이라며 아이를 설득했다. 나와 남편은 온돌이라 뜨끈하다면서 억지로 만족스러운 척을 했고, 아이도 생각해 보니 괜찮은 것 같다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아이의 실망과, 그걸 극복하려는 아이의 노력이 나를 속상하게 만들었다.
남편은 돈을 써야 할 때마다 내 눈치를 봤다. 식당에 가서도 비싼 메뉴는 시키지 않으려고 했고 마트에 가서도 최소한의 간식만 사가려고 했다. 액티비티를 하고 나서는 가격이 너무 세다고 조금 투덜거렸고 고속도로 대신 국도를 타고 가는 게 나을 것 같다고도 말했다. 여행은 매 순간이 소비이기 때문에 남편은 여행하는 2박 3일 내내 내 눈치를 보는 꼴이 되었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행복해했다. 짚라인을 타면서 생각보다 시시했지만 시원했다고 좋아했고, 처음으로 먹는 홍어도 맛있다고 잘 먹어줘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2박 3일의 여행 비용으로 아이의 웃음을 구매한 셈이었다. 나쁘지 않은 소비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날, 협의이혼확정 1차 기일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1차와 2차 둘 중에 하루만 참석하여 판사 앞에서 이혼을 확인받으면 이혼이 확정되는 건데, 나는 아직도 이혼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결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돈 한 푼 없는 남편, 휴대폰비를 내지 못해 거의 한 달째 휴대폰이 끊겨있는 남편, 앞일을 예비하지 못해 항상 허둥거리고 가족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남편, 나에게 거액의 빚을 지게 해 경제적으로 위태롭게 만드는 남편, 결국은 지독하게 무능하고 무능한 남편. 그런 남편을 왜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남편이 만드는 그깟 요리, 남편이 만드는 그깟 웃음, 남편이 만드는 그깟 희망이 나를 결심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 그깟 게 뭐라고, 없어도 먹고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것들인데. 먹고사는 데 지장 없는 것들을 지키느라 먹고사는 것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은 잘될 거라는 믿음이, 그 헛된 믿음이 나를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