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은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는 것일까?

by 휴지기

우리 세 자매는 모두 멀리 떨어져 살고 있어 기념일에만 서로 만나곤 한다. 명절과 엄마 생신, 어버이날, 아빠 기일 즈음에 모이는 것 같으니 일 년에 다섯 번쯤 서로 얼굴을 보고 안부를 물으며 서로의 아들딸들이 커가는 것에 놀라워한다. 그래서 우리는 기념일이 되면 언제쯤 친정에 갈 것인가 논의를 하고 날짜를 맞추곤 했었다. 예전에는 말이다.


나는 원래 내 이야기를 친정엄마에게, 동생들에게 잘하지 않는 편이다. 전에도 글에 쓴 적이 있었던 것처럼 나는 뭐든 괜찮고 싶은, 아니 괜찮은 것처럼 보이고 싶은 쿨병 걸린 장녀이자 큰언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편의 사업이 망했어도 그 이야기를 친정 식구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보다 친정 가족들의 애처로워하는 눈빛과 걱정, 또는 연민을 나는 받아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편의 사업 실패로 인한 나의 가난한 모습이 흘러넘쳐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때가 있었다. 지난 엄마의 생신 즈음이었고, 그때 만난 엄마와 동생들은 나의 사정을 알지만 모르는 척하느라고, 나도 엄마와 동생들이 알고 있는 걸 알지만 괜찮은 척하느라고, 다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느라고 쉽지 않은 시간들을 보냈다. 친정 모임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하나의 큰 과제를 끝낸 것 같은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또 명절이었다. 일 년에 두 번 있는 명절은 왜 이리도 빨리 돌아오는지 모르겠다. 남편은 친정에 가기를 꺼렸다. 엄마와 동생들을 볼 면목이 없다고 했다. 그래 면목이 없겠지, 그렇다고 그 먼 길은, 왕복 열 시간의 장거리 방문을 나와 아이만 갈 수는 없었다. 남편이 협상안을 내놓았다.


"장모님은 괜찮을 거 같아. 근데 동서들은 좀 보기 힘들어."


그래서 결국 나는, 동생들을 피해 친정에 다녀왔다. 시가에 가야 하는 동생들은 연휴가 시작할 때 친정에 다녀갔다. 동생들이 서로 만나 찍은 수십 장의 사진들, 동영상들이 가족 단톡에 올라왔다. 나는 그들을 보지 않기 위해 연휴 중반에 친정에 다녀왔다. 동생 가족들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지 않기 위해 시간을 맞추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친정에 가 있는 동안 엄마 이외에 그 누구도 보지 않았다.


남편은 역시나 엄마 앞에서 기가 죽어 있었다. 남편은 묵묵히, 시간을 견뎠다. 엄마는 나와 둘이 있을 때 괜찮느냐, 살 만은 하느냐, 사위가 돈은 벌어오느냐 등등을 물었고 나는 그냥 다 괜찮다고 말했다. 엄마는 궁금한 것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엄마가 꾹꾹 참으면서 골라낸 몇 개의 단순한 질문들에도 나는 숨이 막히는 듯했다. 나는 대답하기 힘들었다.


밥 두 끼를 먹고 하룻밤을 자고 우리는 돌아왔다. 차가 막혀 여섯 시간 운전해 가서 온전한 하루, 스물네 시간도 보내지 못하고 또 여섯 시간을 운전해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들의 집으로, 아무에게도 우리의 가난에 대해 설명하거나 변명하지 않아도 되는 우리의 안온한 집으로.


엄마의 질문에 가장 길게 한 대답이 이거였다.


"이제 터질 건 다 터졌어. 잘될 것 같아. 이제부터는."


진심이었다. 지긋지긋했던 삼 년이 지나갔다. 지나가지 않을 것 같던 시간들을 꾸역꾸역 버텨냈다. 새로운 해가, 새로운 시간들이 다가왔다. 마침내. 결국은. 드디어.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지만 지난날 우리가 겪은 일보다야 더 힘든 일이 있을까 싶다. 불행을 견뎌내니 힘이 생긴 느낌이다. 바닥을 쳤으니 이제 다시 올라갈 것이다. 우리의 견딘 비극의 시간들은, 우리의 무용담이 될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에는, 우리가 진짜 괜찮아졌다는 걸 친정 식구들에게 알리기 위해 다들 모일 수 있는 시간에 맞춰, 가능하면 모두를 다 볼 수 있는 시간에 친정에 방문할 것이다. 걱정과 안타까움, 수치심, 부끄러움 이런 감정의 티끌들 없이 오랜만에 만나는 식구들에게 느끼는 반가움, 딱 그 감정만 느낄 수 있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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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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