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가 화수분이라니

by 휴지기

재작년 여름쯤이었던 것 같다. 친구의 아는 동생이 사주 공부를 했다 하여 친구가 내 생년월일을 들고 가 사주를 봐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며칠 뒤 친구가 내 사주 결과를 알려주겠다며 만나자고 했고, 친구는 단어 몇 개를 적은 휴대폰 메모장을 켜더니 자신이 들은 나의 사주풀이를 전달해 줬다.


친구가 전달해 줬던 말들 중에 다른 건 다 잊어버렸고 딱 두 개를 기억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내가 어떤 남자를 만나도 화수분이라는 거였다. 화수분, 재물이 끝없이 나오는 항아리. 너무 정확해서 소름이 돋았고 나의 상황을 딱 집어 표현해 주는 화수분이라는 단어에 빵 터져 그 친구와 함께 큰 소리로 웃었다.


남편이 절체절명의 상황에 있을 때마다 내가 남편에게 금전적 지원을 해줬다. 돈이 많아서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신혼 초부터 들었던 적금을 깨고 친정엄마에게 돈을 빌렸으며 연금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 이상하게 남편에게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잦았다. 아이를 위해 모아둔 돈도 깨서 주었고 집을 담보로, 자동차를 담보로, 내 생명보험을 담보로 돈을 빌려 주었다.


그러니 남편의 입장에서는 내가 화수분이 맞을 것이다. 큰돈이 나오지는 않지만 어쨌든 자기가 죽을 것 같은 순간에 내가 나타나 해결해 주었으니. 그런데 이제는 그 화수분이 깨지기 직전이다. 아무리 항아리 밑을 뒤져봐도 더 이상 나올 재물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 위안이 되었던 것은 '어떤 남자를 만나도'라는 부분이었다. 사주풀이에 따르면 내가 화수분인 건 내 사주팔자 때문이었지 남편 때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남편을 선택하지 않고 다른 남자를 선택해 살았어도 어차피 화수분으로 살 팔자였다, 이 사실이 그나마 남편을 덜 원망하게 만들었고, 내 구질구질한 상황에 대해서도 체념하게 만들었다.


사주풀이 중 기억에 남는 다른 한 가지는 재작년 기준으로 내년, 그러니까 작년부터 내 대운이 180도로 바뀐다는 것이었다. 좋지 않았던 운은 좋은 운으로, 좋았던 운은 좋지 않았던 운으로 바뀌어 그것이 앞으로 90살까지 그대로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연히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힘들었기 때문에 그럼 좋아지겠네, 90살까지 큰 걱정 없이 평안하게 살 수 있겠네 하고 기분 좋게 사주풀이는 마무리지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재작년 말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짧게 대화하던 중에 이혼서류를 쓰러 가정법원에 갔다 왔었다는 말을 했다. 그랬더니 친구가 놀라면서


"사실 그때 그 동생이 너한테 올해 이혼수가 있다고 했었어. 근데 이건 안 좋은 얘기니까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했었는데, 어쩜, 그 사주가 맞나 봐."


또 한 번 소름이 끼쳤다. 내가 화수분인걸 맞히더니 내가 가정법원에 다녀온 것도 맞히다니!! 친구는 그 말을 하면서, 올해만 지나면 괜찮다고, 올해 이혼 위기만 잘 넘기면 앞으로는 이혼수는 없다고 말했다고 전해줬었다.


화수분과 이혼 그 두 가지 키워드로 대표되는 내 사주 이야기는 그렇게 끝났다. 친구 아는 동생의 용함을 극찬하며, 그녀가 어디 사주집이라도 차리면 일 년에 한 번씩 신년 운세라도 보러 가야겠다고 친구와 함께 입을 모아 다짐하며.


그런데 이상하다. 작년이 지났는데 상황이 좋아지지 않았다. 언제나 절벽 한 걸음 뒤에 있는 느낌이다. 한 발짝만 잘못 디디면 그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작년에 달라진 건 단 하나. 남편이 요리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는 원래 신이 내린 망각 능력을 지니고 있어 뭐든, 잘 잊는다. 그래서 작년부터 남편이 맛있는 걸 만들어주면 남편 때문에 불행하고 서러웠던 순간들이 잘 잊혔다. 그거 하나뿐이었다. 작년에 달라진 건.


오늘도 아직 오지 않은, 어쩌면 영영 오지 않을, 평안하고 걱정 없는 미래에 빚지며 하루를 시작한다.




keyword
이전 05화다행이다로 시작했지만 거짓말거짓말거짓말이 되어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