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타향(他鄕)살이의 시작은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너무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이민’ 같은 건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겁도 많은 내가, 집순이인 내가. 나도 내가 지금 이곳에 살고 있을 거라고 상상해보지도 못했다. 시작은, 나도 남들 다 하는 해외 경험 한번 해보자, 넓은 세상을 경험해 보자.라는 아주 어리고 가벼운 생각과 마음에서 시작됐다. 그 마음이, 이렇게 내 인생을 송두리 째 바꿔 놓을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처음 이 땅에 발을 내디딘 것은, 대학시절에 학교에서 보내준 어학연수 프로그램이었다.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비행기 티켓과 어학원비를 조금 보조해 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교에서 제안한 프로그램은 3개월짜리 어학연수였고,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올지 알 수 없었던 나는 호주에 최대한 머무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때마침 워킹홀리데이라는 프로그램이 티브이와 인터넷을 통해 대중들에게 조금씩 알려지고 있었고, 비자의 최대 체류기간인 1년을 꽉 채워 호주에 머물러 보기로 결정했다. 물론, 내가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를 대비하여 언제든지 내가 원하면 언제든 바로 도망칠 구석(오픈티켓)도 마련해 두고 시드니로 향했다. 그러나 1년 뒤, 도망칠 구석을 마련하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눌러앉을 궁리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마찬가지로 호주로의 이민은 하늘의 별 따기라고 말할 정도로 빡빡하고 어려웠다. 시드니 생활 내내 만났던 워킹홀리데이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내가 영주권자나 시민권자를 만날 일은 거의 없었다.)은 ‘영주권’ 하나만 바라보며 불리한 조건으로 노동력을 제공하기도 하고 비자 사기를 당해 호주에서 추방당하기도 했었다. 나는 그때만 해도 정확히‘영주권’이 뭔지도 몰랐고, 왜 멀쩡한 사람들이 고향 땅을 떠나와서 이 고생을 해가며 매일을 눈물로 살고 있는지.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시드니 생활 1년 동안 일했던 가게에서 영주권 스폰서십제안이 들어왔었는데, 나는 그 기회가 얼마나 얻기 어려웠었던 건지도 그 기회를 가볍게 뻥 차버리고 한참 뒤에나 알게 되었다. 내가 그때 그 기회를 왜 바보같이 왜 차 버렸냐면, 제안을 받고 부모님께 상의 차 전화를 걸었는데, 원래 계획대로 한국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취직해서 사는 삶을 권하셨고 나도 그때는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후, 회사생활을 하면서 이런저런 일에 치이다 보니, 마냥 행복하기만 했던 호주 생활이 그리워졌고 결국에는 도망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영주권을 따기 위해 매일을 눈물로 살았다.
아직도 엄마아빠는 말씀하신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 그때, 우리가 들어오라는 말만 안 했어도 우리 딸 고생 덜 했을 텐데…….”
그럼 나는 답한다. “지금이라도 여기서 사는 게 어디예요. 저는 정말 행복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