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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는 윤별경 Dec 13. 2024

즐거워야만 하는 졸업식.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중3 가을 어느 토요일.

오전수업을 마치고

친구와 놀다가, 집으로 향해

사과밭길로 걸어오고 있었다.

저 멀리 자전거를 끌고 오는

 아버지가 보였다.


4월에 은퇴하신 아버지는

등산을 하시거나 친구들과

놀러 다니셨기에 낮시간에는

집에 계시지 않으셔서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나를 본 아버지는

"자전거 체인이 빠졌으니,

집에 끌고 가거라"

얼굴이 하얗게 질린 아버지를

보면서, 걱정이 앞섰다.


"아버지! 뭔 일 있어요?"

"니 오비가 사고가 났단다.

교통사고. 내 아들이 사고가 났어"

아버진 주저앉으셨다.


"저도 가요.아부지"

"걱정 말고 자전거 끌고 집에 가라.

엄마가 놀랐으니, 잘 챙겨주고.

아버지 니 오래비델꼬 병원 가서

집으로 전화할 테니 엄마 모시고 병원온나.알겠제! 울지 말고.

퍼뜩 집에 가거라"


오빠는 행정공무원이 되어

우리 면 면사무소에서 근무를

지 2년이 된 무렵이었다.


토요일 오전근무를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오던 중

술을 마신 공사차량 운전사에

의해 사고를 당하게 되었다.

오빠는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중환자실에서 처참하게

누워있었다. 엄마는 기절하셨다.


1년간 엄마는 오빠옆에서

병간호를 하시었고, 의사들도

가망 없다고 하였지만,

엄마는 사랑하는 아들을

살려내셨다. 그 후 오빠는

퇴원하여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심한 후유증으로 입원과 퇴원 

여러 차례 하게 되면서 우리 가족은

오빠가 아프면 병원으로 가야

하였기에, 늘 긴장하며 살았고

자연스럽게 정적인 생활이

되어버렸다.




새벽명이 밝아 즈음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조용한 시골동네에 잉! 휘!

세차게 부는 바람소리만

더해졌을 뿐이었다.

또각또각 어제 사서 신은

구두소리에 옆집 개들이

다가 놀랐는지, 짖어댔다.



조용히 나의 방문을 열어

옷가방을 내려놓고

코트를 벗어 놓으려고 할 때

엄마가 들어오셨다.

자다가 일어나셨는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다듬으며 들어오셔서,

"일찍 도착했네. 지랑

오빠는 아직 잔다. 쉬고 있어라

이따가 밥묵자."


부엌에서 달그락거리

식사준비하는 엄마의 소리를

들으며 새벽 3시에 회사버스

타고 내려와야 했기에 피곤한

몸을 누이며 잠에 빠져들었다.


몇 시간 후

"엄마 졸업식 갔다 올게.

마치고 친구들과 놀다가

늦게 올 거니깐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

"아침은 먹고 가야지!"

마가 부르는 소리에도 

아득하게 들릴만큼

빠르게 달려 나왔다.


수원에서 한 달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주 구정연휴가 있어

열흘간 휴가를 지내고

수원으로 가면 되기에,

내일부터 가족들과 신나게

지내면 될듯하였다.


상업고등학교이기에,

3학년 2학기후반부터

취업을 하기 시작하였고

나와 친구 10명

수원에 있는 S그룹 반도체에

성적순과 면접을 통해

1월부터 취업을 한 상태였다.


2교대 주. 야간 근무시스템이라

힘들기도 했지만 학교친구들이

있었고, 다른 학교에서 온

또래 친구들이 있었기에, 

피곤한 줄 모르고 재미있게

근무를 하였다.




졸업식행사를 위한 강당엔

후배들과 친구들이 모여있었다.

취업한 친구들은 벌써부터

성인이 된 향기를 품어내었다.

곱게 화장한 여자친구들이

많았으며, 머리에 살짝 웨이브도

넣었고, 굽 높은 구두도 신고

학교에 오기도 하였다.


남자아이들은 깔끔하게

이발을 하고 끔한 정장에

반짝반짝 구두까지 신고 와서

멋을 뿜어냈다.


어릴 때 신은 빨간가 아닌

원피스를 입고 하얀색 하이힐에

갈색 코트와 전날 수원의

어느 미용실에서 머리드라이까지

 졸업식 참석한 나였다.


공무원이었던 오빠는

면장님모시고 학교졸업식

참석하러 왔다가 나를 보더니

 "오래 놀지 말고 일찍 와라"

꽃다발을 건네주 면장님과

식장을 떠나갔다. 


친구들은 부모님과 가족들과

사진을 찍었다. 나는 오빠가 준

꽃다발은 있었지만, 축하하러 

와 준 가족들이 없었기에

멋쩍어 뒤로 물러나있었다.

나의 졸업식에 한 번도

부모님이 오시지 않았다.


국민학교 졸업식엔

아버진 군인의 신분이었고,

엄만 외갓집의 부고로

대구 계셨다.

휴가 나온 오빠와 작은언니가

축하해 주러 와서 짜장면을 

같이 먹었고, 가난한 군인이

오빠는 막냇동생의 졸업사진을

찍어주지 못했다.


중학교 때는 오빠의 사고로

부모님이 경황이 없으셨고,

고등학교땐 오시지 않을 거라고

각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오시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나의 졸업사진

가족과 찍은 사진이 없다.


졸업식을 마치고,

친구 명과 선배오빠가

일하고 있는 대구에서 제법

유명한 나이트클럽으로 향하였다.


우리 이제 진성인이!

아이들과 함성을 르며

나이트클럽에 입성하였다.


One Way Ticket

(♤클릭여 그 시절로 가보아요!

 전 이 노래가 그렇게 좋더라고요)

Harlem Desire

(릭해 보이소)



가족들이 없었던 쓸쓸한

졸업식이었지만, 누구보다

축하해 주는 나만의 졸업식

이어야 했기에, 그날밤

처음 가본 나이트클럽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는 나였다.





[나의 어린시절 야기를

마칩니다.  읽어주시고,

원해주신 작가님들께 감사합니다!

매일 행복한 날들 되시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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