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장: 며칠 전에 사내 게시판에 아마 강과장을 지목한 불만 글이 올라왔는데 말이지. 어제 인사부에
강 과장이 직장내 힘희롱을 했다는 고충이 들어왔어.
보람: 네? 제가 누굴 힘들게 한다고? 미쳤어. 누구지? 내가 평소에 애들 모르는 거 다 알려주고 얼마나 챙기는데.
김부장: 나는 강과장이 잘 챙기는 거 알지. 그런데 요즘 애들이 받아들이는 게 좀 다르잖아. 그게 부당한 일을 시키거나 일을 알려주지 않는다는 게 아니야. 자기를 무시하고 남들 앞에서 창피를 줬다네.
보람: 무슨? 참 어이가 없네.
김부장: 무작정 화내지는 말고. 애들이 어려서 사회생활을 잘 모르니까 이해해. 그래도 요즘 애들이 남들 앞에서 말 듣는 거 정말 힘들어하잖아. 자기들이 도와달라고 하는 게 아니면 알려줘도 별로 안 좋아한다고. 신대리하고 내가 자리를 마련할 테니까 좀 달래주고. 사람들 앞에서 "머리가 느리다"라고 말한 거는 미안하다고 하고.
보람: 내가 지한테 알려준 게 얼마나 많은데. 머리 나쁘다고 말한 것도 아니고.앞으로 말을 아예 안 해야겠네. 부장님. 저는 할 말이 없으니까 그냥 절차대로 하세요. 부장님은 할 일 하신 거니까 피해 안 가게 할게요. 어쨌든 저는 잘못한 거 없고 애들 버릇 나빠지게 비위 맞춰주는 거 반대입니다.
보람씨는 이렇게 면담을 마치고 부장님 방을 나섰습니다.
요즘 왜 이렇게 자신을 오해하고 헐뜯는 사람이 자꾸 생기는지 속상했습니다. 이전 같지 않게 자신 특유의 당당함도 사라지는 것 같았죠.
한 달 전.
보람씨 아들과 유치원 때부터 단짝인 준서의 엄마가 커피 한잔 마시자고 연락이 왔습니다.
준서맘: 성찬이 엄마. 내가 오늘 할 말이 있거든.
(사람들이 이런 표정으로 말을 꺼내면 꼭 뭔가 끝이 안 좋았는데..)
보람: 언니. 왜요? 제가 혹시 실수한 게 있었어요?
준서맘: 아니. 나야 성찬이 엄마 항상 편하고 좋지. 어제 강민이 엄마한테 전화를 받았거든.
보람: 제가 싫대요?
준서맘: 아니. 좀 들어봐. 지난번에 과학캠프 추진해서 가기로 한 거 있잖아. 성찬이 엄마가 항상 그런 거 잘 알고 챙겨주니까 나는 고마웠지. 그런데 강민이가 과학을 싫어해서 스트레스가 컸나 봐. 집에서 엄마한테 짜증내고 소리 지르고 해서 강민이네가 속상해서 전화가 왔더라고.
보람: 아니. 그럼 안 가면 되지. 근데 그게 왜요?
준서맘: 아휴. 애들끼리 친하잖아. 4명이 다 간다고 하는데 강민이만 빠지는 게 쉽겠어? 그래서 강민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런가 봐. 강민이 엄마가 어디 가고 하는 거를 한 번만 물어봤으면 하고 서운해하더라고.
보람: 아니. 그럼 그때 말을 하지.
준서맘: 그러게. 안 그래도 그날 강민이 엄마가 말이 없긴 했거든. 다들 좋아하니까 말할 틈이 없었나 보지.
준서맘과 대화를 나눈 날 보람씨는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과학 캠프를 취소해버렸습니다. 단톡방에서 다른 엄마들이 많이 아쉬워하는 눈치였죠. 이후로 마음이 불편해서 엄마들 모임에 나가는 것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남편과는 결혼 초부터 사소한 일로 늘 다툼이 잦았습니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는 꼭 필요한 말만 하고 거의 대화가 없는 편이었죠. 남편은 대화 주제와는 상관이 없는 '자신을 무시한다. 말이 기분 나쁘다.' 이런 말로 트집을 잡으니 말이 통하지가 않았습니다.
엄마들 일도 속상한데 직장에서도 이런 일이 생기니까 기분이 너무 언짢고 뭔가 일이 다 꼬이고 잘 못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일주일 내내 잠을 설치고 나니 일은 일대로 안 되고 모든 게 엉망진창입니다. 그리고 정신건강의학과에 찾아오게 된 것이죠.
쌤: 보람씨는 머리 회전도 빠르고 추진력도 좋으시네요.
강: 오지랖이죠. 맨날 사서 고생하고 후회하고.
쌤: 그렇다면 이전보다 덜 나서고 고생하는 일을 덜 하면 어떨까요?
강: 그게 안 되니까 문제죠. 머리에서 '이렇게 하면 되겠다' 생각이 드는 순간에는 이미 말이 나가고 몸이 움직인 후 인데요.
쌤: 어릴 때도 이런 성향 때문에 고생하거나 후회하는 일이 있었나요?
강: 여기 다니면서 상담하면서 제가 입방정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지금까지 마음고생한거 대부분이 입방정과 오지랖하고 다 관련이 있더라구요.
쌤: 학교 다닐 때는 어땠는데요?
강: 친구들은 많았죠. 반장도 하고 학생회장도 하고.
쌤: 인기가 많으셨네요.
강: 아니에요. 하도 제가 나서기를 잘 해서 감투는 잘 맡는데 꼭 끝이 안 좋았어요. 늘 뒷 말 하는 애들이 생기더라구요.
쌤: 그 동기들이 보람씨의 어떤 것에 불만이 있었던 거 같아요?
강: 뭐. 눈에 띄는 사람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리고 제 말투 따라하면서 뒷담하는 애도 있었구요. 선생님하고 친하다고 싫어하는 애도 있었구요.
쌤: 궂은 일 맡고 좋은 일 하는 건데 학생 보람이는 그때 정말 억울했겠네요.
강: 뭐 원래 그런 애들은 그렇게 사라고 하고 무시했죠. 하긴 그런 말 들으면 한 몇 일은 기분이 안 좋았어요.
강: 아. 고등학교 때 제 별명이 '강다람쥐'였어요. 하하하.
쌤: 아. 뭔가 잽싸게 움직이고 추진력이 좋아서?
강: 비슷해요. 제가 체구가 작으면서 움직임도 빠른것도 있고 다람쥐가 주변을 돌아보며 스캔하는게 비슷하대요.
쌤: 하하. 그렇군요. 어떤 이미지인지 상상이 돼요. 자!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지요. 지난 시간에 보람씨가 어린 아이일 때 정말 호기심이 많고 질문이 끊임없이 많았다고 했지요. 엄마가 버겨워할 정도로요.수업시간에 궁금한 질문은 바로 바로 물어봐야했구요.
강: (끄덕끄덕)
쌤: 그리고하고 싶은게 늘 많았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엄마가 도와주지 않으면 마무리가 안 되거나 쉽게 포기했다고 하셨죠.좋아하는 것만 하려고 했다고 하셨구요. 어릴 때부터 호불호가 강한 성격인거죠. 오늘 말씀해주신 청소년기에는말과 행동이 한 박자 앞서는 바람에 난처한 일들이 많았다고 하셨구요. 남들의 말을 길게 듣는게 어렵다고도 하셨지요.
강: 네. 맞아요. 이 모든게 한가지로 압축이 된다는 말씀이세요?
쌤: 네. 역시 회전이 빠르십니다. 앞서 말한 내용들과 보람씨가 최근에 겪은 일은 한 가지 진단으로 연결이 되는 것 같아요.
강: 혹시...?
쌤: 네. 성인 ADHD입니다. 지난 시간에 하고 가셨던 설문지 AARS 점수가 총점이 무려 185점이 나왔어요. 부주의, 충동성, 정서조절 모두 높게 나왔어요.
강: (ㅜㅜ표정) 속상해야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 안심이 되네요. 그래도 제 행동을 설명하는 이유가 있다는게 마음이 편해져요.
보람씨는 전산화주의력 검사에서 청각 주의력이 반응시간이 길게 나타났고 억제지속 주의력과 간섭주의력이 뚜렷한 손상을 보였습니다.
참고 기다리는게 또 남의 말을 주의깊게 듣기가 어려웠던 것이죠. 그리고 사소한 자극에 뇌가 쉽게 반응하다보니 다른 사람의 이런저런 일에 끼어들고 휘말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람씨는 성인 ADHD를 진단받게 됩니다. 둘째를 가질 계획이 생겨서 치료제 사용은 보류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이해하는 관점이 생긴 보람씨는 진단을 받은 그 자체로 만족하면서 상담 치료만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상기 사례는 진료를 받았던 특정인의 개인사가 결코 아니며 상당수의 성인 ADHD 진료 경험을 토대로 한 공통적으로 호소하는 증상과 참고 문헌의 사례를 재구성하여 작성한 가상의 사례임을 밝힙니다)